투덜투덜2009/06/12 06:29
 최근 종강을 맞아 기말과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나절 과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고 시청으로 나갔다. 작년보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역시 분노의 에너지는 슬픔보다 강한 모양이다- 그래도 올해 들어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최대로 모인 것 같다. 경찰측 추산으로는 5만명, 주최측 추산으로는 15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얼추 10만명 내외로 모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작년 촛불정국 당시와 비교하였을 때, 무난하게 모인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6월 10일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는 참여주체들이기는 하다. 촛불 때와는 달리 범야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87년 이후 최대도전연합이 정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다.
 하지만 상기해야 할 점은 87년도의 최대도전연합 형성은 박종철의 사망 자체로 터진 것이 아니라, 사망경위에 대한 은폐기도에 대한 분노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이한열의 현장에서의 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세는 87년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당시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도전연합을 포섭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지배블록과는 달리 현재의 지배블록은 딱히 도전연합을 포섭할만한 동기가 없다. 지배블록 내부의 분화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친박계가 민주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또한 예상대로 청와대는 야권에 대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동강령 역시 수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중도하차하게 만들 뾰족한 수단과 명분이 모두 없다는 점-아쉽게도, 2MB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상당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들까지 대표하여야 하는 체제이다-에서는 정국을 타개할 방법이 더욱 묘연하다. 국회에서의 탄핵소추 발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게다가, 설사 친박계의 초강수로 탄핵소추가 발의된다 하더라도, 이는 사법의 정치화를 뒤집은 정치의 사법화로의 역편향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이 정부를 하차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찰스 틸리의 지적대로 동원에서 성공적인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특히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의 속성을 고려한다면(어제 광장에 모인 상당수는 정장을 빼입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이 2MB 를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만들어내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리가 만무하다.
 2MB 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끌어내릴 수 없다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앞으로의 3년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문화과학」과 「한겨레 21」에서 이야기하는, 2MB가 파시즘 X 로 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버' 임에 분명하지만, 3년간 고민하고 대비해야 할 것은 2MB 이후이다. 2MB 다음으로 올 것은 박근혜의 보나파르티즘인가, 유시민의 보수적 민주주의인가, 제 3의 인물의 파시즘 X인가. 2MB 정부의 헤게모니 상실과 비효율적인 무리한 통치행위, 그리고 거리의 반정치적 정치 사이에 부재하는 정치를 회복할 길은 아직 멀어보인다. 역시 우리가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한 안티테제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이다. 6월 항쟁 22주년을 맞아 우리는 '독재 세력' 이라는 손쉬운 적이 아닌, 복잡하고 뒤틀린 역사의 미로 속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복잡한 문제다.
Posted by 데학생
광대의 사회학2009/02/21 12:14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발터 벤야민

 

1. 들어가는 말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에는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하여 이민자들의 우두머리 클로팽을 위시한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이 등장하여 은신처와 자유를 요구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들의 요구는 초기에는 은신처에 대한 일차적 요구에서 출발하지만 억울하게 갇힌 감옥에서 탈출하여서는 보편적인 자유, 평등, 박애를 요구하는 데에까지 이른다(프랑스 작품답다). 이민자들의 투쟁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점거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신부 프롤로와 국왕의 근위대장 페뷔스가 연합한 공권력에 의하여 클로팽이 사망하며 불법체류자들이 진압되는 것으로 사태는 종결된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종교권력과 파리를 통제하던 국왕의 권력-당시는 근대적 형태의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이므로 프랑스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이 연합하여 지배블록의 안정성에 균열을 내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이다. 요컨대 극중에서 지속적으로 부각되는 균열축은 무산자들과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 간의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낳은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은 특정 시대를 다루더라도 모든 시대의 보편적 문제들을 그 안에 투사하여 볼 수 있게 만든다. 불법체류자들을 타도하라는 프롤로와 페뷔스의 코러스, 은신처를 달라는 클로팽의 절규는 14세기 파리가 아닌 21세기 용산 한복판을 무대로 하여 다시 울려 퍼졌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는 현재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 열연중이지만 그것의 현대적 변주는 2009년 1월 20일 용산 국제빌딩 4구역에서 전국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아트센터의 푹신한 좌석과 다채로운 조명, 멋진 연기자들 대신 조잡한 망루와 볼품없는 컨테이너, 험악한 경찰특공대가 출연하였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계급투쟁의 좌절이라는 비극에는 고전적인 품격보다는 현실적인 비천이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현실적인 비극은 관객들에게 예술적 가공이 만들어내는 숭고미를 선사하는 대신 어떠한 가공도 없는 유혈과 폭력, 그리고 화염이 난무하는 처절한 현실을 볼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계급 간 갈등이 신의 이름을 빌어 진행되었다면 오늘날의 계급투쟁은 그 모든 외피를 벗어버린 채 노골적인 이익의 이름 아래 진행된다. 그리고 용산참사가 대표하는 계급간 갈등은 건설자본으로 대표되는 대부르주아와 영세 상인이 주를 이루는 쁘띠 부르주아간의 갈등이다. 철거민들은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 그들의 악랄한 정책 때문에 갑자기 생겨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도 용산과 같은 신화적 폭력의 투쟁현상을 뚫고 살아오고 있다. 따라서 용산참사에 대해 야권에서 주장하듯 악랄한 정권의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과거 그들의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야만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경향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요인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이다.

 

2.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경향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 문제이다. 1970년도의 통계를 보면 자영업주는 54.6%, 임금, 봉급 생활자는 27.5% 이지만 1995년에 이르면 자영업주는 31.5% 로 크게 감소한 반면 임금, 봉급 생활자는 42.1% 로 크게 증가한다. 양극화를 가속화시킨 주범으로 지목당하는 소위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도입되기 전부터 계급적 양극화는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은 전통적으로 중소 자영업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왔던 사업 영역들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5월 말까지 매출액 순위 5,000위내의 대기업에 백화점이 모두 73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중 100위 내에는 3개, 101위에서 500위 내에는 19개, 501위에서 1,000위 사이에는 18개 업체 등 1,000 위 내에 총 40개 업체가 포함되어 있다. 1996년도에 2,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백화점은 전국적으로 22개에 이르며 순위는 롯데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잠실점, 현대백화점 본점의 순이다. 또한 LG 그룹, 롯데그룹 등이 진출해 있는 편의점 체인은 대체로 이익을 점주에게 40%, 본사에 60% 으로 나두고 있으며 외식 산업 역시 롯데리아와 두산과 같은 대자본들에 의해 대부분의 매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위의 통계들은 외환위기 이전의 상황이며 외환위기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은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하였고 그 자리를 메꾼 것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자본들이었다. 또한 당시 많은 퇴직자들이 퇴직금을 밑천삼아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업종을 바꾸며 퇴직금을 날려먹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경기가 침체될수록 더욱 강화되어 지난해 자영업주는 재작년에 비해 7만9000명이 줄어듦으로서 2000년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600만 명 밑으로 내려간 가운데 올해 영세 자영업자들의 체감경기지수는 38.7 로 작년 9월의 61.4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앞의 통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경기침제로 폐업한 쁘띠 부르주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뿐이며 그/ 그녀는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된다. 그야말로 위기의 자영업이다.

 

 한국의 경제구조는 기본적으로 대기업 위주로 짜여있으며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영세 상인에 대한 고려 없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는 실정이기에 영세 상인들은 단골화를 통한 사회적 자본 형성 외에는 생존을 보장하는 뾰족한 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단순히 대기업에 의한 영세 상인의 상권잠식을 방관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국가권력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영세 상인들이 간신히 형성해놓은, 생존을 위한 사회적 자본을 해체하며 그들의 생산수단까지 빼앗아 대기업에게 건네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국가권력이 개입한 계급간 갈등의 분수령을 이루며 그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번 용산참사를 야기한 서울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을 뒤에서 주도하는 삼성물산이 역세권 개발 사업에서 얻는 이익은 1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삼성물산은 포스코, 대림과 함께 재개발 후 주상복합 아파트를 시공하는 데 이 분양가는 1평당 3500만원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반면 개발을 추진하는 재개발 조합에서 세입자에게 제시한 보상금은 대부분 개인당 5천만원을 넘지 않으며 이는 세입자들이 상가를 분양받기 위하여 투자한 권리금 및 시설 개선비용에 턱없이 못 미치는 비용이다. 상가 세입자가 아닌 단순한 주거 세입자 역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재개발 이후 턱없이 상승한 임대료를 이기지 못해 집값이 싼 지역으로 이주를 하는 실정에서 생계의 수단인 상가 및 모든 단골관계를 해체당한 채 반강제로 내쫓기는 상가 세입자들의 입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이 망루에 오른 것에는 보상금 한두 푼을 더 받아내기 위한 경제학적인 동기 이전에 생활터전과 생존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론적 동기가 작용하였음은 분명하다.

 

 간단한 숫자만 보더라도 용산 재개발 사업은 건설재벌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영세 상인들을 거리로 내모는 무자비한 사업이라는 것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의 쁘띠 부르주아는 대부르주아가 허용할 때 까지만 계급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방식의 계급 양극화가 전 세계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용산참사를 야기한 잔혹한 개발 사업을 자본주의의 보편적 운동법칙으로 일반화하여 급진적인 체제전복을 대안으로 삼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영국은 한국과 같이 기존 건물을 모두 파괴하고 수익성이 높은 중대형 아파트를 건설하는 전면 철거 재개발 방식 자체를 지양하고 있으며 일본은 지주와 개발자 조합에 의하여 철거가 진행되는 한국과 달리 주거재정비 사업이 공공 차원에서 진행되는데다가 소득에 따라 차등 임대료를 부과하여 실질적인 주거권을 보장해주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대기업 역시 영세 상인들의 몫에 대한 욕심은 동일할 것이지만 국가가 나서서 그와 같은 야만적인 계급이익 추구를 저지하고 있다. 한국의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이다.

 

 대자본이 용산에 눈독을 들이고 깃발을 꽂자마자 정부는 그곳을 치외법권 지대로 선포하였다. 그곳은 폭력과 돈이 지배하는 비열한 거리가 되었으며 자본의 냄새를 맡은 폭력의 사도들이 몰려들어 그곳을 처참과 난무의 장으로 만들었다. 조합이 고용한 철거용역은 철거를 거부한 세입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쇠파이프와 목검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신고를 하여도 경찰이 오지 않고, 30대 용역깡패에게 구타당한 70대 노인이 깡패에게 맞고소를 당해 구속영장이 나오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용산 4구역 철거를 맡은 철거회사가 재작년에 올린 매출은 75억 6200만원에 달하지만 철거민들은 법에 호소하여도 돌아오는 것은 생떼 부리지 말라는 엄포뿐이었다. 공권력과 법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의 마지막 수단은 자조(self-help)적 폭력이다. 그리고 자조적 폭력으로서의 망루가 등장하자마자 그동안 용산의 아비규환에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정부는 최정예 병력인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대자본의 이익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 들을 신속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정부가 철거민들을 ‘정치’ 의 대상이 아닌 ‘치안’ 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 사이의 타협의 과정이지만 치안은 정치적 시민권-타협의 주체로 인정받는-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민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격리하는 과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제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누미디아에 개입하였던 억지를 방불케 한다. 애초에 교전권을 박탈한 대상들에 대한 박해를 허용한 뒤 박해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면 그것을 빌미삼아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이러한 억지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통용되기 힘든 문법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시민세계의 안정’을 위한 치안권 행사의 정당성에는 어떠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망루의 철거민들을 치안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망루에서 화염 속으로 사라진 7명의 영혼은 모두 그들의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승천하여야 했다. 정부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치안의 대상으로 전락한 5명의 영혼과, 헌법적 가치가 아닌 대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용역깡패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일을 수행하여 폭력수단의 정당성을 잃어버린 1명의 영혼.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계급편향적 행태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당하는 쁘띠 부르주아의 목소리는 정치의 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들은 대자본이 만들어내는 쾌적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다. 단절되어 있는 세계 간에는 소통이 존재할 수 없으며 소통이 없는 곳에는 노골적인 힘의 대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게다가 단절된 계급 사이의 가교가 되어야 할 정부는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를 자처함으로서 정치라는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1973년 재개발에 대한 법이 공포된 이후 서울에서 진행된 재개발 사업 977건 중 969건이 조합에게 개발을 맡긴 민영 개발 방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의 포기는 한국 국가권력의 고질적 병폐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배반의 인민주권, 기만의 법치주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권력은 유권자들이 만들어내는 결정의 중요성에 달려 있지, 그들이 행하는 결정의 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용산의 철거민들에게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공직자에 대한 선출권은 주어졌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공직자들이 철거민 자신의 문제를 의제로 삼지 않는 한 이들의 목소리는 정상적인 정치경로를 통해서는 대표될 수 없다. 정치의 의무는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정치과정 내로 끌어와 이익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균열축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갈등이란 다수의 지지를 결집해 정부를 통제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협애한 이념지형 내에서 대립해온 한국의 정치과정에는 시민들 간의 이익충돌을 정치적 균열축으로 반영할만한 제도가 부재한다.

 

 한국의 정부는 끊임없이 통합을 강조하지만 갈등을 직시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통합이란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기만, 혹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한 동원 구호에 그치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 그 감소폭이 늘어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의 인구대비 자영업자 비율은 여전히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특수하게 높은 편이다.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의 시민권조차 불온시 되는 사회에서 이들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표로 말하는 정치과정 내에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자들의 발언력이 사회 극소수 지배블록의 발언력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이라기보다는 회사의 주주총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회사라는 조직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1인 1표가 아닌 1원 1표의 원칙이 통용되는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 속에서 인민주권이라는 말은 허상일 따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은 갈등에 관여하는 집단과 개인의 성격 및 수에 따라 갈등이 치환되기도 하며 갈등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 탄핵 안건이 제기 되었을 때 운집한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한나라당 및 구 민주당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손쉽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최대한 갈등을 사사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광범위한 여론을 동원하기 위해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사회화 된 갈등축을 중심으로 동원된 전국의 시민들의 합의결과가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인민의 주권이 보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이 그렇지 않음은 명약관화 하며 기존 정권에서도 사회적 의제가 인민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정규직법 개악과 한미FTA를 둘러싼 논란을 사회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시민사회 자신에 의하여 기각되었고, 시민사회는 스스로 버린 인민주권에 의해 배반의 시대를 맞이하는 실정이다.

 

 용산참사 직후 정부와 여당은 도심테러, 알카에다, 불법폭력시위 등의 격한 어휘를 동원해가며 법치 기강 확립을 천명하였다(이러한 어법은 지난 정권에서도 다소 온건한 형태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점을 상기하자). 하지만 국가의 형성과 작동방식을 마피아와 같은 조직범죄단의 활동방식과 비교했던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의 구분이 사실상 어려움을 지적한다. 정부는 특정 지역에서 매우 중앙집권화 된 강제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그 지역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구성원들에게 그 같은 수단의 사용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는 협박집단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그의 논지는 특정인에게는 정당한 폭력행사가 타인에게는 부당한 폭력행사라는 것이다. 거의 동일한 행동이 불법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 양 측에 모두 걸쳐 있으며, 단지 정치적 판단만이 그것을 구분 짓는다. 요컨대 국가 자체가 본질적이고 신성한 도덕성을 담지하지 않는 이상 국가에 의하여 행사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공권력의 행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적인 법에 의하여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며 법은 사회의 제반 세력들의 이익을 광범위하게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법은 지배블록의 이익을 위한 일방적 규범 이상이 아니게 되며 이에 의해 행사되는 공권력 역시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폭력에 의한 타도대상일 뿐이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준수하여야 한다는 법실증주의자들의 규범적 논리와는 달리 현실에서 법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법을 준수할 때 가지는 인센티브가 존재하여야 한다. 법치주의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되는 말은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의 지배가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사회집단간의 세력균형에 기반하며 상충하는 이익들 간의 공존틀로서 작동한다면 법에 의한 지배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을 확대하고 지배블록의 이익 실현에 복무하는 퇴행적인 형태이다. 법의 지배는 기본적으로 원활한 정치과정을 위한 전제 조건이며 정치는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법이라는 합리적 규칙을 수단으로 하여 조정하는 과정이다. 합의와 소통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과정을 도외시 한 채, 법이라는 물화된 규범만을 강조하며 그에 당위적으로 복종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강제적 질서를 부여하는 법에 의한 지배에 불과하다.

 

 용산참사에서 나타난 정부와 사법부의 행태는 전형적인 법에 의한 지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일정 시기 법의 집행자들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시기에 탈법적 행위를 저지른 특정인이나 집단에게는 이익이 된다. 용산에 망루가 설치되기 전 치외법권 상태에서 이익을 보았던 세력은 누구였는가. 철거민들의 농성에 대한 법적 규정에 대해 비전문가로서 비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겠지만, 최소한 법의 적용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사법부와 경찰에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1918년과 1922년 사이 독일에서 우익 투사들이 308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11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반면, 좌익 투사들은 21건의 살인 사건으로 3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2009년 검찰의 구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극우 반동세력의 집권을 열어주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법부를 연상케 한다. 일반적으로 법의 적용 및 판결에는 사법부의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 특수이익으로부터의 자율성, 사회에 대한 책임성이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용산에 대해, 그리고 사회의 피억압 계층에 대해 위의 세 가지 요소가 최소한 중립적으로 작용하였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법의 지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지배자 혹은 지배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힘을 법에 종속시켜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법은 예측 가능한 합리성이라는 속성을 사회 강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권력행사 유혹에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용산참사를 둘러싼 지배블록의 행태는 법의 지배를 가능케 하는 요건들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굴욕감을 안겨주고 싶은 유혹을 좀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부자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지배계급이 합리적이라면 피지배계급에게 일정한 정도의 지분을 양보함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분노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부르주아와 이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국가권력은 자신들의 몫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경제적 약자 계층에 대해 정치를 통하여 파이를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혜와 치안 중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보이는 무소불위의 오만함은 힘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즉각적으로 폭발하는 증오심을 자극한다.

 

 최근 서울시는 14곳의 뉴타운 사업을 ‘속도전’ 으로 강행한다고 발표하였으며 심지어 참사가 발생한 용산 4지구 개발조합은 세입자를 위해 짓도록 되어있는 임대아파트 건축을 피하고자 하는-수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소송을 내기까지 하였다. 이에 비하면 경제적 문제를 확률의 문제로 치환시킨 정부의 철거민 대책은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넘겨 보아줄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 지배계급의 이와 같은 뻔뻔함은 일종의 기억상실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정부가 관리하는 자원, 즉 토지와 경제적 잉여가 영세 상인들이 제공한 것이며, 자신들 역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제구조 속에서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이러한 기억상실증을 지적해줄 정부 역시 함께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집권은 사회의 대다수 가난한 자들의 투표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도외시하고 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현재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율은 월 소득 100만 원 이하의 계층에서 46.9% 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참여정부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계층일수록 그 배신감 역시 큰 법이다.

 

4. 정부를 찾아 나선 6명의 시민들

 

 지금까지 다루었던 문제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 의한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2. 건설자본과 합작한 정부에 의한 강제적 무산화 3.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정부 차원에서의 정치적 배제. 갈등의 범위는 후자로 갈수록 넓어지며 따라서 뒤쪽의 문제일수록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여론의 상당수가 용산참사에 대해 동정적이더라도 용산참사 이후 각각의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는 역시 정치의 무능에서 기인한다. 지배블록이 제 3자 개입 금지 조항 등을 통하여 갈등의 사사화를 유도한다면 저항블록은 최대한 광범위하며 시민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갈등축을 만들어내어 자원을 동원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제기되는 ‘살인정권’ 등의 주장은 특정 정치세력을 악마화 하여 모든 것을 그의 악의에서 기인한 것으로 치부한 채 특정 정치세력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저항블록이 공허한 최대강령적 구호만을 외치고 있는 사이 대기업은 단가 후려치기 등의 저질 상도덕을 무기로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미 종래의 재래시장을 괴멸시킨 대형 마트 시장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대기업은 최근 대형 슈퍼마켓 사업에 진출하여 ‘구멍가게’ 의 매출을 50% 이상 떨어지게 만들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매출 감소만이 아니다. 대기업의 진출로 인해 상권이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은 인근 상가의 임대료를 상승시키고 매출마저 감소하는 처지의 영세 자영업자 입장에서 상승하는 임대료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다. 또한 현재 서울의 뉴타운 상황은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 시절 추진한 것만 하더라도 1차 3곳, 2차 12곳, 3차 11곳 등 총 34곳 184개 구역에 이른다. 이 지역들의 세입자는 모두 21만 6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72.4 %를 이루며 이 중 80% 이상이 상가 세입자, 즉 용산의 철거민들과 같은 처지이다. 이미 경기 용인시에는 세입자 15명이 현실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세운 망루가 1년째 서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와 전문성은 다소 의심스러우며 서울시 당국은 적반하장으로 뉴타운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정치적 대안의 부재와 합법적 소통구의 차단, 죄여오는 생계의 압박은 결국 부르주아와 몰락 위기에 처한 쁘띠 부르주아 간에 노골적이고 격렬한 계급투쟁을 야기할 가능성을 부상시킨다. 이미 지역의 영세상인들 사이에서는 ‘폭동이 왜 일어나는지 알겠다’ 는 한숨 섞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찰스 틸리는 반란이나 혁명과 같은 집합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탈법적 개인이 아닌,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조직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용산참사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전철연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마지막 대안으로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별개로 맑스는 단순히 불이익에 대한 반발인 즉자적 계급의식이 계급투쟁을 선도하는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전이되기 위해서는 공장과 같은 모임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철거촌의 좁은 망루들은 이미 훌륭한 계급적 증오의 재생산지이며, 전국적 연락망을 갖춘 전철연과 같은 조직은 각지의 망루들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공유시키고 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의 기획이 성공하여 서울은 거대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도시가 된다면, 서울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이 쫓겨난, 서울 외곽의 지역에서는 자연스레 내쫓긴 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의 상황이 노골적인 계급투쟁을 버텨낼 정도의 체력이 되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계급투쟁을 통해 어떤 계급이 승리하든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고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 무기력증 및 혐오증이 광범위하게 독처럼 퍼져있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 혁명에 참여하길 기대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기에 그래도 좋은 정치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1929 년 대공황에 직면한 후 절대적인 생존문제가 주된 관심사로 부상한 미국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본격화 되면서 국가와 기업을 무시한 채 노동자들 스스로가 공장의 생산수단과 물물교환을 통해 생존을 유지하는 자조(self-help)운동이 사회 전역을 휩쓸었다. 공화당 행정부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강경책을 구사하였지만 이어 집권한 루즈벨트 행정부는 뉴딜 정책을 통해 자조운동이 가지고 있던 정부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그 강력한 에너지를 미국 사회 내부로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와그너 법(Wagner act)의 통과는 계급간의 갈등을 정치과정 내에서 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북부의 공업자본과 남부의 농업자본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무력으로 대립하였던 남북전쟁과 같은 계급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정치는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손을 놓고 한탄하거나 혁명적 수단을 찾아보기 전에 보아야 할 것은 지난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은 40%의 사람들이다. 투표를 하지 않은 책임을 인민의 무지와 무관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유한 계층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태이며 이는 피지배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던 논리이다. 그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갈등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선택지와 대안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이들의 억압된 갈등을 가시화 하여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국회의사당에서 들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용산참사가 낳은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은 기존의 철거투쟁에 대해 과격성을 이유로 외면하던 시민들이 철거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철거민의 수는 전 국민의 수에 비하면 소수이기에 이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축이 형성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에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의제는 훨씬 광범위해지며 이것은 철거민뿐만 아니라 균열축을 둘러싼 갈등에 동원된 모든 시민들의 이익까지 포괄할 수 있다. 이념적 순결성을 만족시키고 투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최대강령적 운동이 아닌,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실재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세심한 정치가 필요하다.

 

 물론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하며 특히 철거가 아닌 대자본의 상권장악에 의한 쁘띠 부르주아 계급 자체의 몰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아직까지는 정치의 힘이 다소 모자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정치라 하더라도 그동안 왜곡된 형태로 지속되어 왔던 자본과 정치의 힘의 역학구도를 단번에 뒤바꿀 재간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몰락한 계급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다른 방식의 삶을 찾아 나서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좋은 정치에 대한 모든 희망과 노력을 포기하고 모두가 냉소의 품으로 도피한다면 언젠가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가득 찬 서울에서 나가는 방향의 톨게이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를 지나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여기서 나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2/04 23:27

 북녘 동포들의 인권을 위해 귀중한 달러까지 뿌려가며(인권을 위한 행동은 2MB 정권의 외화유출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불철주야 애쓰는 극우단체들의 철지난 삐라 살포 덕분에 반도가 시끌벅적하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단체들과의 육탄전까지 벌어졌으며 당시 스패너와 가스총까지 사용하여 삐라 살포를 강행한 극우단체들은 최재성 민주당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교동 DJ 자택 앞에서 삐라를 살포하는 등 그 활동반경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 ‘진정성’을 따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저들의 행위에서는 그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 북녘 동포들의 인권을 개선하기를 원한다면 좀 더 거시적이고 세련된 전략을 짜든가 직접 북한에 잠입하여 주민선동 및 주석궁에 대한 테러라도 자행할 일이다. 저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386 세대 운동권은 거시적 투쟁전략을 짜고 공장과 농촌에 잠입하였었다. 자칭 애국보수라면 최소한 친북좌파들의 정부전복투쟁보다는 훨씬 더 가열찬 실천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군인 서정갑까지 가세하여 뜬금없이 남한의 현직 국회의원의 이름을 북한에 알려주는 저들의 행태는 ‘북한 인권 개선’ 보다는 ‘악의 축 김정일과 그의 친구 김대중에 대한 전투본능 분출’ 을 진정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저러한 행위가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초등 논리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통탄할 일이지만.

 정부 관계자 및 여당은 이들은 애국적 동기에서 활동한 것이기에 이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어도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여 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상식적이고 민주적인 대응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아무리 조악하고 빈약할지라도 그것을 말할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엉터리 주장에 대한 강제적 입막음은 그것의 전면적 수용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렇지만 말할 자유와 행동할 자유는 별개의 문제이다.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행위에 대한 평가는 그 동기를 중시하는 심정윤리와 더불어 그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와 여당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자유주의의 시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의 몇 구절도 살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모든 개인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보호자인 사회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요컨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에는 공권력의 개입도 정당화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1. 과연 삐라를 살포하는 극우단체들은 책임윤리에 충실한가 2. 삐라를 살포하는 행위에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면 그들은 책임윤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하며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설정하지 않은 것 같다. 삐라살포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에 대해 ‘이것이 정상적인 남북관계’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들과 한통속인 저들의 행위는 책임윤리라는 개념 자체를 망각한 무책임한 자위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쟁이 발발한다면 자신들이 주석궁에 대해 자폭공격이라도 할 것인가? 혹은 남북관계 파탄으로 인해 개성공단이 철거된다면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해서 개성공단 입주자들에게 보상이라도 해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 자신들의 대답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저들의 행위를 묵과할 이유가 없다. 책임윤리에 충실하여 자신들의 인생과 목숨을 걸고 진지하게 추진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망각한  단순한 화풀이에 전 시민의 안전을 담보로 내걸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옳은 일이 아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간다. 저들의 행위가 다른 국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침은 명백하다. 자유주의의 샴쌍둥이인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소수 극우 집단의 전투본능 충족에 따른 효용의 합 보다는 대다수 시민의 남북관계 안정으로 얻는 불안 감소라는 효용이 합이 훨씬 커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명백하다. 이들의 발언의 자유는 보장해 주되, 다수의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동시에 ‘국익’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강제력 행사가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설령 저들의 삐라 살포가 진정성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심정윤리가 아닌 책임윤리의 영역이기도 하거니와 밀은 <자유론> 의 다른 구절에서 어린이와 같은 정신적 한정치산자들에 대한 자유의 규제를 정당하다고 선고하였다(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접적 행동에 대한 규제만을 말할 뿐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한 규제는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당수의 국민이 막힌 공론장에 답답함을 느껴 뛰쳐나온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던 정부가 소수 극우단체의 집단 자위에 대해서는 갑자기 선진 민주정부로 돌변하였다는 점이다. 촛불시위에 따른 해외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보다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한 불안심리가 훨씬 더 커 보임에도 말이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자세는 높이 사야 할 것이나 그 기준이 이중적인 데다가 진압대상과 대화대상의 선정이 뒤바뀌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실 저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남북관계를 대결구도로 몰아간 정부의 살벌한 분위기 조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평소 자신들과 어울리는 신문들의 광고면과 시청 앞 광장에서만 활동하던 분들이 어쩌다가 임진각까지 노구를 이끌고 나올 결심을 하였겠는가. 정부가 굳이 강제력을 쓰지 않고도 진심으로 저들을 설득하기를 원한다면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생각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1세기 전인 15세기 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비운의 종교개혁가 요하네스 후스의 화형식 현장에서 한 신실한 늙은 노파가 악마를 퇴치하려는 경건한 마음으로 화형대의 장작더미를 나르고 있다. 화형대에 묶여 있는 후스는 노파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참 순진한 성자(聖者)시구려”. 광신도들의 특성은 구체적 가치의 내용보다는 초월적인 단어 자체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순진한 성자' 들 역시 마찬가지로 신앙의 본질보다는 '교회' 혹은 '교리' 라는 껍데기에 목을 맨다. ‘우리 MB가 다 해주실 거야’ 아줌마에서부터 부산의 청년백수, 그리고 메말라가는 남북관계에 삐라라는 불쏘시개를 쑤셔 넣는 극우단체까지 아직 2MB 교황의 추종자들 중에는 순진한 성자들이 많아 보인다. 그들에게 전하는 예수의 한마디. “저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소망교회 신자들은 경건하게 아멘을 복창할지어다.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