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투덜2009/06/12 06:29
 최근 종강을 맞아 기말과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나절 과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고 시청으로 나갔다. 작년보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역시 분노의 에너지는 슬픔보다 강한 모양이다- 그래도 올해 들어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최대로 모인 것 같다. 경찰측 추산으로는 5만명, 주최측 추산으로는 15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얼추 10만명 내외로 모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작년 촛불정국 당시와 비교하였을 때, 무난하게 모인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6월 10일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는 참여주체들이기는 하다. 촛불 때와는 달리 범야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87년 이후 최대도전연합이 정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다.
 하지만 상기해야 할 점은 87년도의 최대도전연합 형성은 박종철의 사망 자체로 터진 것이 아니라, 사망경위에 대한 은폐기도에 대한 분노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이한열의 현장에서의 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세는 87년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당시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도전연합을 포섭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지배블록과는 달리 현재의 지배블록은 딱히 도전연합을 포섭할만한 동기가 없다. 지배블록 내부의 분화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친박계가 민주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또한 예상대로 청와대는 야권에 대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동강령 역시 수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중도하차하게 만들 뾰족한 수단과 명분이 모두 없다는 점-아쉽게도, 2MB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상당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들까지 대표하여야 하는 체제이다-에서는 정국을 타개할 방법이 더욱 묘연하다. 국회에서의 탄핵소추 발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게다가, 설사 친박계의 초강수로 탄핵소추가 발의된다 하더라도, 이는 사법의 정치화를 뒤집은 정치의 사법화로의 역편향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이 정부를 하차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찰스 틸리의 지적대로 동원에서 성공적인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특히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의 속성을 고려한다면(어제 광장에 모인 상당수는 정장을 빼입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이 2MB 를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만들어내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리가 만무하다.
 2MB 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끌어내릴 수 없다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앞으로의 3년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문화과학」과 「한겨레 21」에서 이야기하는, 2MB가 파시즘 X 로 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버' 임에 분명하지만, 3년간 고민하고 대비해야 할 것은 2MB 이후이다. 2MB 다음으로 올 것은 박근혜의 보나파르티즘인가, 유시민의 보수적 민주주의인가, 제 3의 인물의 파시즘 X인가. 2MB 정부의 헤게모니 상실과 비효율적인 무리한 통치행위, 그리고 거리의 반정치적 정치 사이에 부재하는 정치를 회복할 길은 아직 멀어보인다. 역시 우리가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한 안티테제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이다. 6월 항쟁 22주년을 맞아 우리는 '독재 세력' 이라는 손쉬운 적이 아닌, 복잡하고 뒤틀린 역사의 미로 속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복잡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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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의 변주곡2009/05/24 15:34

 노무현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정치적 비판은 하지 않는 것이 당분간 고인에 대한 나의 마지막 예의다. 그리고 사실 노무현이라는, 중간계급의 방향 못잡는 열정을 물화한 주체가 사라진 이후로는 굳이 노무현이라는 개인을 물고 늘어진다는 것은 별 의미없는 화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본체' 가 사라지고 각 개별주체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노무현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현실에 존재하였던 노무현이라는 단일한 본체를 공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노무현 개인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본다. 최장집과 박상훈에게 유시민이 계속 컴플렉스를 가지고 반발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의 방증 아닐까.
 주목해야 할 것은 노무현의 캐릭터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그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 스스로가 바꿔놓은 사회적 맥락이며 중간계급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수만명의 그가 모여 만들어낼 사회적 맥락이다. 그리고 현재의 추모열기 역시 하나의 현상이다. 모든 사회적 현상은 대상화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걱정되는 것은 한국정치의 강렬한 동일시 효과-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으로서, 국민은 정치인을 지지할때 그의 정책을 합리적으로 평가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감정적 동일시를 통해 선택한다는 개념-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열망과 실망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 정도면 학습효과를 가질때도 되지 않았을까.
 가뜩이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그리고 동일시 효과가 빚어내는 미디어 정치의 강세에서 질낮은 언론의 범람 속에서 계속해서 노무현과 같은 '현상' 이 벌어지는 것은 결국 남미식 포퓰리즘으로의 수렴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망자에 대한 예의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건 살아있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망자에 의해 산 자의 삶이 규정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노무현을 기억하자. 하지만 그를 마음속에 모시지는 말자.
 
p.s.1. 아마 중간계급이 노무현을 기억하고 소비하는 방식과,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이 노무현을 기억하고 소비하는 방식은 명백히 다를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동일하게 나타나는 추모물결의 뒤에 존재하는 심층심리의 차이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p.s.2. 재미있는 것은 남미에서는 노무현과 같은 포퓰리즘 정치가 횡행한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인들은 노무현을 유일무이한 현상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거대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남한 중간계급이 얼마나 자기 외의 세계에 무지하며 자기중심적인 내셔널리즘에 빠져있는지를 방증해준다. 어제 추모식에 등장하였던 거대 태극기와 울려퍼지는 아리랑은 소아병적 내셔널리즘의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노무현과 비슷한 말로를 걸은 브라질의 포퓰리스트 제툴리우 바르가스(http://en.wikipedia.org/wiki/Get%C3%BAlio_Vargas)의 유서 마지막 줄
 
"Serenely, I take my first step on the road to eternity and I leave life to ente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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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의 변주곡2009/05/24 03:23

0.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는 과도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굳이 몇 줄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것이다. 내가 할 일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어떠한 감상을 배제한 채,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는 것이다. 파토스는 이미 넘칠대로 넘쳤다. 총체적 분석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개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1. 노무현 시대의 종언은 결국 노무현 시대보다 더욱 강렬한 반정치의 정치로 회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수단에 의한 갈등해결의 통로를 막아버린 이명박 정권이라는 환경과, 노무현 자신이 만들고 죽음으로서 완성시킨 반정치적 순수성에의 열망의 결합은 결국 거리의 정치라는 형식으로 귀결될 것이다.

 

2. 운동에 의한 정치의 문제점은 사안들을 위계화함으로써 포괄이슈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노무현에 의해 덮일 여러가지 사안들이 안타깝다. 가버린 사람도 안타깝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여러 미래들이 더 안타깝지 않을까.

 

3. 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과거의 일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기에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노무현의 유산을 계승하는 작업은 곧 실패한 노무현 시대에 대한 분석의 작업이지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속의 노무현의 영접이 아니다.

 

4. 노무현의 죽음이 동원하는 시민은 결국 중간계급의 촛불, 노무현의 촛불이다. 이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노무현의 목소리를 내면화 함으로써, 즉 노무현을 선택할 당시의 자신의 가치관을 영속화 함으로써 진화없는 동일한 과정의 반복을 연출한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분리는 09년 5월 23일 노무현 추모 집회와 민주노총 집회의 분리로 반복되며, 매개가 없는 양자의 단절은 또다시 도덕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중간계급의 자기만족적 정치, 계급적 증오에 의해 추동되는 노동계급의 파괴적 정치라는 반정치적 정치를 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5. 현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는 결국 살아있는 자들 스스로를 위한 추도이다. 이것은 자연인 노무현이라는 단일 인격체가 아닌, 정치인 노무현에게 투사된 자신들의 욕망과 열정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중간계급의 물화된 시대정신인 노무현이 사라짐으로써, 그것도 이명박정권의 검찰수사에 의해 사라짐으로써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은 노무현을 추모하는 형식을 통해 노무현에게 투사했던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기념하고 인정한다. 급진적으로 자신과 단절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는 중간계급에게 있어서 노무현 시대를 청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노무현에 의한 호명에 응하는 것이 훨씬 쉬운 선택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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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세상/국제2009/04/22 17:54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영향은 경제대국 일본 역시 피해가지 못하였고 그 결과는 ‘격차사회’ ‘워킹 푸어’ ‘상실의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침체된 경제사회적 현실로 나타났다. 노마 필드는 이러한 일본의 출구 없는 모순 속에서,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9년에 출판된 코바야시 타끼지의 소설 <게 공선>에 대한 젊은 층의 열광을 분석한다(<시평> 일본의 사회현실과 『게 공선』의 부활, 창작과 비평 통권 143호). 필드는 <게 공선> 붐의 원인을 단순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돌리는 것을 경계하며 그 붐 속에 나타나는 현대 일본사회의 의식을 읽어내고자 한다.
 
필드에 따르면 중년의 좌파들에게마저 도덕적 채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외면당하고 있던 타끼지를 부활시킨 것은 우연과 필연의 일치였다. 특히 우파 펑크록 밴드에서 노동운동가로 전향한 아마미야 카린은 <게 공선> 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단순한 상황인식 틀로서의 <게 공선> 에 대한 관심은 곧 사회변혁 및 연대에 대한 주장으로 전화한다. <게 공선> 이 일본사회에서 가지는 함의는 단순한 메타포를 뛰어넘으며 중년층의 반전운동과 청년층의 빈곤운동을 결합시키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눈앞에서 행해지는 야만적 착취에 대한 환기 및 즉자적 반발을 넘어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라는 구조 자체에 대한 대자적 저항을 주문하는 타끼지의 문제의식이 현재의 사회경제적 정세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드가 말한 대로 <게 공선> 붐이 표현하는 집단성과 행동주의에 대한 갈증이 노동의 필요성과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잘 사는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실질적인 성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요망된다. 얼마 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시사주간지 칼럼(시사IN 76호<보수파의 양심을 위하여>)에서 <게 공선> 의 부활과 일본 우파 학자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예로 들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에서의 대전환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향이 곧 파렴치한 거래의 자유에서 벗어난 시민적 결사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30년대의 세계 경제공황 당시에도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필두로 한, 기존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지만 그 귀결은 곧 파시즘이었다. 기타 잇키나 오타와 슈메이 등 당시 일본의 파시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물질에 기반을 둔 천박한 문명이라 비난하며 정신주의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디로든 튈 수 있는 공이라는 것이다. 구좌파와 신좌파, 신신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이념의 경계를 어려움 없이 넘나드는 아마미야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투영물을 발견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군상은 민주주의적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군국주의의 환상으로 치달은 미시마 유키오와 겹치며 사회주의 기관지 <전진> 의 편집장이었던 무솔리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내비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대자적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채 즉자적 저항의지만을 표출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은 노동자의 총파업 및 파시즘에 동시에 열광하였던 생디칼리스트 소렐의 모습에 가장 가까워보인다.
 
특히 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비참할 정도의 정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게 공선> 붐 이후의 상황전개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힘들게 만든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바다와 같은 인민의 일반의지와 국가를 직접 접촉시키려는 시도는 대개 데마고그에 의한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 의회 정치과정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수이익들의 갈등을 제도화 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 정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즉, 정치인이 그 지지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그 행위에 대해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가 필수적이지만 현대 일본 정치에서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의 불만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내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정치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억압된 갈등들은 노골적인 힘의 행사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시도는 용산참사와 같이 국지적으로 진압되거나 폭력혁명과 같은 거대한 피바다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저항의 움직임이 폭력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그것이 제도화 된 정치의 영역에서 대변되지 못한다면 저항세력이 요구하는 내용들은 실제 제도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오히려 깊은 실망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 사례로는 한국의 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한때 주최 측 추산으로 전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을 동원한 촛불시위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였으며 역으로 지배블록의 자신감만 키워준 채 시민들에게는 저항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만을 남겨놓았다. 필드의 글에서 묘사하는 일본사회에서는 <게 공선>을 둘러싼 직접 행동적 열망만을 읽어낼 수 있으며 좋은 정치와 제도에 대한 성찰은 읽어내기 힘들다. 정치가 부재하는 일본에서 지속적인 열정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시민간의 연대가 얼마나 국가의 모습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맑스의 말대로 역사는 반복되며 현재의 모든 운동은 과거의 상징을 빌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게 공선> 은 현재의 세대가 빌려오는 과거의 상징이다. 근대문학이 종언된 현재에서 진행되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시절의 상징을 빌려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고 보나파르트 역시 삼촌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듯이, <게 공선> 을 빌려온 세대가 만들어가는 운동은 <게 공선> 이 그려내는 시대의 운동보다 왜소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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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사회학2009/03/02 18:49

 최근 진보신당의 당헌 및 당규를 둘러싼 논의가 수면위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당내에서 일어났던 논쟁들은 고도의 추상성을 담보하는 이념적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현실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제도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집권을 목표로하는 공당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특정 정당이 아무리 좋은 이념을 가지고 있어도 이념을 현실에 반영시킬 좋은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정당이론가 사르토리의 지적대로 제도는 우선 작동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제도는 그 자체가 도덕성의 판단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재(制裁)와 보상(報償)으로 구성된 유인체계의 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도덕성 혹은 진정성을 검증하는 종교재판이 되기 쉽다. 아쉽게도 현재 당내에서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사르토리가 말한 구체적인 제도의 작동기제 및 기대효과와 같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제도의 취지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여성할당제이다. 3월 1일 당 대회에서 논의하게 될 당헌 및 당규 원안에 의하면 전체 선출직과 임명직 중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며 선출직의 할당은 일반명부와 분리된 여성명부에 대한 투표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제도가 여성의 정치참여라는 선한 동기와는 달리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위의 규정에 의거하여 치러진 최근 대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제도의 문제점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극적인 문제점을 들자면 명부 할당을 맞추기 위해 일반명부가 없이 여성과 장애인 대의원만을 선출해야 하는 일종의 게리맨더링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최근 필자와 권병덕, 허건 대의원이 함께 발의한 당헌 및 당규 개정안은 여성 할당 비율을 3명당 1명으로 조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합단일명부에 의한 선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의무적으로 배정된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당원을 동원하는 폐단 (애초 취지와는 달리 여성의 정치‘참여’ 가 아니라 ‘복무’를 읍소하는 실정) 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조정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할당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쏟아지는 규탄은 발의자들의 지적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교정수단을 제시하지 않으며 제도의 이념적 당위성만을 내세우고 있다.

 

여성의 정치참여를 당위로 내세워 현행 여성할당제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주장의 이면에는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직접통치를 의미하며 모든 ‘민주적 가치(양성평등, 경제적 평등 등)’ 들을 포함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강령적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인민의 직접통치를 강조하며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 자신에 의해서만 대변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수의 합의를 통해 정책으로 표현되는 정당의 목소리와 개개인이 말하는 감성적 체험담을 구분하지 못하는 낭만적 사고일 뿐이다. 그리고 여성만의 특수이익이 존재한다면 이는 여성 부문 창설 후 이에 대한 할당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전체적 할당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부문으로 조직화된 여성은 오히려 지역과 부문별로 산개된 여성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 단일한 목소리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인민이 피치(彼治)에 대해 동의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단순히 여성정치인의 수를 양성평등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현재 한나라당의 당헌에는 지역 대의원 및 국회의원 지명 대의원의 50%를 여성으로 할당하게 되어 있으며 최고위원과 같은 고위직의 경우는 여성당선자가 한명도 없을 경우 여성 최다득표자에게 한 자리를 배당해주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게다가 현재 한나라당에는 박근혜, 나경원, 전여옥 과 같은 스타급 여성 정치인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한나라당이 여성친화적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여성의 수가 아니라 정당 내부의 여성친화적 분위기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기계적 할당이 아닌 선거과정에서의 철저한 검증과 여성친화적 개혁정책의 개발을 통해 해결할 문제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강령적 이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작동 가능한 제도적 절차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표와 책임의 체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전 영역에 걸친 여성할당은 다른 부문할당에 비해 과잉대표 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각 지역과 부문 내의 여성이 여성 스스로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면, 비정규직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대표 가능성 역시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어떠한 근거에서 성별만이 전 영역을 포괄하여 각자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대표되어야 하는 근본모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가. 따라서 근본적으로 보자면, 여성할당은 부문으로 배정되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여성할당제로 인해 생겨난 공간을 채울 소명의식 있는 여성 정치가 자체가 극도로 부족한 실정에서 전 영역에서 의무적으로 공간을 비워놓는다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행위이다. 이미 제도권에 안착한 기성정당과는 달리 가용가능한 자원이 매우 적은 신생정당에게 있어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은 정당의 집권가능성과 제도권 안착을 가로막는 중대한 질곡으로 작용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단순히 당내 여성정치인의 수가 성평등지수와 연결된다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 기회비용을 냉정하게 계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전 영역에 대한 여성할당제는 성별을 막론하고 당직을 희망하게 만드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여력이 된 이후에야, 그리고 당이 생존의 단계를 넘어 가치를 둘러싼 담론에 공식 행위자로서 들어갈 정도의 위상을 지닌 후에야 검토해 볼 문제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자 우대법이 역사적 과정이 있으며 자원이 풍족한 호황기에는 다수의 관용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자원 자체가 부족한 불황기에는 오히려 다수의 증오감을 유발하기 때문에 소수자 우대법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서 소수자의 불이익과 다수의 불안 모두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중재 지점을 찾는 오바마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정치인의 희소성이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망자 자체의 희소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컨대 차기 여성 정치인을 양성하는 교육과정의 수립과 같은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많은 문제를 보이고 있는 여성할당제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당내 여성권익 향상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 실제적인 여성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현재와 같은 형태의 여성할당제가 도덕적 명분 외에 구체적인 실익을 낳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단순히 당내 여성정치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넘어 여성이 실제적 권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과도한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접근에서 벗어나 문제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통해 현실적인 사고를 제약한다. 사안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끊임없이 도덕적 열정과 규탄을 수반하며 이는 정치과정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들어설 기반을 해체하며 정치를 검증 불가능한 진정성의 경쟁장으로 만드는 나쁜 효과를 낳는다.

 

 여성할당제에 대한 기존의 논의 상당부분이 비이성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동원된 여성주의 이데올로기는 억압과 투쟁이라는 세계관을 통해, 여성에게 배당되어야 할 몫의 양에 대한 합리적 계산 제안마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며 이는 매우 감정적인 반발로 표출된다. 하지만 정당은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집단이며 정당의 운영은 일차적으로 집권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정당이 집권 외의 사안-예컨대 당내 ‘실질적’ 민주주의의 보장-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자족적 공동체 이상의, 사회 내에서 변화를 추동하는 의미 있는 세력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의 내용이지 통치의 주체가 아니다.

Posted by 데학생
광대의 사회학2009/02/21 12:14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발터 벤야민

 

1. 들어가는 말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에는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하여 이민자들의 우두머리 클로팽을 위시한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이 등장하여 은신처와 자유를 요구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들의 요구는 초기에는 은신처에 대한 일차적 요구에서 출발하지만 억울하게 갇힌 감옥에서 탈출하여서는 보편적인 자유, 평등, 박애를 요구하는 데에까지 이른다(프랑스 작품답다). 이민자들의 투쟁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점거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신부 프롤로와 국왕의 근위대장 페뷔스가 연합한 공권력에 의하여 클로팽이 사망하며 불법체류자들이 진압되는 것으로 사태는 종결된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종교권력과 파리를 통제하던 국왕의 권력-당시는 근대적 형태의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이므로 프랑스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이 연합하여 지배블록의 안정성에 균열을 내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이다. 요컨대 극중에서 지속적으로 부각되는 균열축은 무산자들과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 간의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낳은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은 특정 시대를 다루더라도 모든 시대의 보편적 문제들을 그 안에 투사하여 볼 수 있게 만든다. 불법체류자들을 타도하라는 프롤로와 페뷔스의 코러스, 은신처를 달라는 클로팽의 절규는 14세기 파리가 아닌 21세기 용산 한복판을 무대로 하여 다시 울려 퍼졌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는 현재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 열연중이지만 그것의 현대적 변주는 2009년 1월 20일 용산 국제빌딩 4구역에서 전국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아트센터의 푹신한 좌석과 다채로운 조명, 멋진 연기자들 대신 조잡한 망루와 볼품없는 컨테이너, 험악한 경찰특공대가 출연하였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계급투쟁의 좌절이라는 비극에는 고전적인 품격보다는 현실적인 비천이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현실적인 비극은 관객들에게 예술적 가공이 만들어내는 숭고미를 선사하는 대신 어떠한 가공도 없는 유혈과 폭력, 그리고 화염이 난무하는 처절한 현실을 볼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계급 간 갈등이 신의 이름을 빌어 진행되었다면 오늘날의 계급투쟁은 그 모든 외피를 벗어버린 채 노골적인 이익의 이름 아래 진행된다. 그리고 용산참사가 대표하는 계급간 갈등은 건설자본으로 대표되는 대부르주아와 영세 상인이 주를 이루는 쁘띠 부르주아간의 갈등이다. 철거민들은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 그들의 악랄한 정책 때문에 갑자기 생겨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도 용산과 같은 신화적 폭력의 투쟁현상을 뚫고 살아오고 있다. 따라서 용산참사에 대해 야권에서 주장하듯 악랄한 정권의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과거 그들의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야만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경향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요인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이다.

 

2.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경향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 문제이다. 1970년도의 통계를 보면 자영업주는 54.6%, 임금, 봉급 생활자는 27.5% 이지만 1995년에 이르면 자영업주는 31.5% 로 크게 감소한 반면 임금, 봉급 생활자는 42.1% 로 크게 증가한다. 양극화를 가속화시킨 주범으로 지목당하는 소위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도입되기 전부터 계급적 양극화는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은 전통적으로 중소 자영업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왔던 사업 영역들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5월 말까지 매출액 순위 5,000위내의 대기업에 백화점이 모두 73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중 100위 내에는 3개, 101위에서 500위 내에는 19개, 501위에서 1,000위 사이에는 18개 업체 등 1,000 위 내에 총 40개 업체가 포함되어 있다. 1996년도에 2,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백화점은 전국적으로 22개에 이르며 순위는 롯데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잠실점, 현대백화점 본점의 순이다. 또한 LG 그룹, 롯데그룹 등이 진출해 있는 편의점 체인은 대체로 이익을 점주에게 40%, 본사에 60% 으로 나두고 있으며 외식 산업 역시 롯데리아와 두산과 같은 대자본들에 의해 대부분의 매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위의 통계들은 외환위기 이전의 상황이며 외환위기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은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하였고 그 자리를 메꾼 것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자본들이었다. 또한 당시 많은 퇴직자들이 퇴직금을 밑천삼아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업종을 바꾸며 퇴직금을 날려먹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경기가 침체될수록 더욱 강화되어 지난해 자영업주는 재작년에 비해 7만9000명이 줄어듦으로서 2000년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600만 명 밑으로 내려간 가운데 올해 영세 자영업자들의 체감경기지수는 38.7 로 작년 9월의 61.4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앞의 통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경기침제로 폐업한 쁘띠 부르주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뿐이며 그/ 그녀는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된다. 그야말로 위기의 자영업이다.

 

 한국의 경제구조는 기본적으로 대기업 위주로 짜여있으며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영세 상인에 대한 고려 없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는 실정이기에 영세 상인들은 단골화를 통한 사회적 자본 형성 외에는 생존을 보장하는 뾰족한 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단순히 대기업에 의한 영세 상인의 상권잠식을 방관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국가권력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영세 상인들이 간신히 형성해놓은, 생존을 위한 사회적 자본을 해체하며 그들의 생산수단까지 빼앗아 대기업에게 건네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국가권력이 개입한 계급간 갈등의 분수령을 이루며 그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번 용산참사를 야기한 서울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을 뒤에서 주도하는 삼성물산이 역세권 개발 사업에서 얻는 이익은 1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삼성물산은 포스코, 대림과 함께 재개발 후 주상복합 아파트를 시공하는 데 이 분양가는 1평당 3500만원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반면 개발을 추진하는 재개발 조합에서 세입자에게 제시한 보상금은 대부분 개인당 5천만원을 넘지 않으며 이는 세입자들이 상가를 분양받기 위하여 투자한 권리금 및 시설 개선비용에 턱없이 못 미치는 비용이다. 상가 세입자가 아닌 단순한 주거 세입자 역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재개발 이후 턱없이 상승한 임대료를 이기지 못해 집값이 싼 지역으로 이주를 하는 실정에서 생계의 수단인 상가 및 모든 단골관계를 해체당한 채 반강제로 내쫓기는 상가 세입자들의 입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이 망루에 오른 것에는 보상금 한두 푼을 더 받아내기 위한 경제학적인 동기 이전에 생활터전과 생존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론적 동기가 작용하였음은 분명하다.

 

 간단한 숫자만 보더라도 용산 재개발 사업은 건설재벌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영세 상인들을 거리로 내모는 무자비한 사업이라는 것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의 쁘띠 부르주아는 대부르주아가 허용할 때 까지만 계급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방식의 계급 양극화가 전 세계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용산참사를 야기한 잔혹한 개발 사업을 자본주의의 보편적 운동법칙으로 일반화하여 급진적인 체제전복을 대안으로 삼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영국은 한국과 같이 기존 건물을 모두 파괴하고 수익성이 높은 중대형 아파트를 건설하는 전면 철거 재개발 방식 자체를 지양하고 있으며 일본은 지주와 개발자 조합에 의하여 철거가 진행되는 한국과 달리 주거재정비 사업이 공공 차원에서 진행되는데다가 소득에 따라 차등 임대료를 부과하여 실질적인 주거권을 보장해주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대기업 역시 영세 상인들의 몫에 대한 욕심은 동일할 것이지만 국가가 나서서 그와 같은 야만적인 계급이익 추구를 저지하고 있다. 한국의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이다.

 

 대자본이 용산에 눈독을 들이고 깃발을 꽂자마자 정부는 그곳을 치외법권 지대로 선포하였다. 그곳은 폭력과 돈이 지배하는 비열한 거리가 되었으며 자본의 냄새를 맡은 폭력의 사도들이 몰려들어 그곳을 처참과 난무의 장으로 만들었다. 조합이 고용한 철거용역은 철거를 거부한 세입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쇠파이프와 목검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신고를 하여도 경찰이 오지 않고, 30대 용역깡패에게 구타당한 70대 노인이 깡패에게 맞고소를 당해 구속영장이 나오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용산 4구역 철거를 맡은 철거회사가 재작년에 올린 매출은 75억 6200만원에 달하지만 철거민들은 법에 호소하여도 돌아오는 것은 생떼 부리지 말라는 엄포뿐이었다. 공권력과 법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의 마지막 수단은 자조(self-help)적 폭력이다. 그리고 자조적 폭력으로서의 망루가 등장하자마자 그동안 용산의 아비규환에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정부는 최정예 병력인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대자본의 이익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 들을 신속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정부가 철거민들을 ‘정치’ 의 대상이 아닌 ‘치안’ 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 사이의 타협의 과정이지만 치안은 정치적 시민권-타협의 주체로 인정받는-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민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격리하는 과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제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누미디아에 개입하였던 억지를 방불케 한다. 애초에 교전권을 박탈한 대상들에 대한 박해를 허용한 뒤 박해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면 그것을 빌미삼아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이러한 억지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통용되기 힘든 문법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시민세계의 안정’을 위한 치안권 행사의 정당성에는 어떠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망루의 철거민들을 치안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망루에서 화염 속으로 사라진 7명의 영혼은 모두 그들의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승천하여야 했다. 정부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치안의 대상으로 전락한 5명의 영혼과, 헌법적 가치가 아닌 대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용역깡패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일을 수행하여 폭력수단의 정당성을 잃어버린 1명의 영혼.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계급편향적 행태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당하는 쁘띠 부르주아의 목소리는 정치의 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들은 대자본이 만들어내는 쾌적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다. 단절되어 있는 세계 간에는 소통이 존재할 수 없으며 소통이 없는 곳에는 노골적인 힘의 대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게다가 단절된 계급 사이의 가교가 되어야 할 정부는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를 자처함으로서 정치라는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1973년 재개발에 대한 법이 공포된 이후 서울에서 진행된 재개발 사업 977건 중 969건이 조합에게 개발을 맡긴 민영 개발 방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의 포기는 한국 국가권력의 고질적 병폐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배반의 인민주권, 기만의 법치주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권력은 유권자들이 만들어내는 결정의 중요성에 달려 있지, 그들이 행하는 결정의 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용산의 철거민들에게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공직자에 대한 선출권은 주어졌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공직자들이 철거민 자신의 문제를 의제로 삼지 않는 한 이들의 목소리는 정상적인 정치경로를 통해서는 대표될 수 없다. 정치의 의무는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정치과정 내로 끌어와 이익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균열축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갈등이란 다수의 지지를 결집해 정부를 통제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협애한 이념지형 내에서 대립해온 한국의 정치과정에는 시민들 간의 이익충돌을 정치적 균열축으로 반영할만한 제도가 부재한다.

 

 한국의 정부는 끊임없이 통합을 강조하지만 갈등을 직시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통합이란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기만, 혹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한 동원 구호에 그치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 그 감소폭이 늘어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의 인구대비 자영업자 비율은 여전히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특수하게 높은 편이다.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의 시민권조차 불온시 되는 사회에서 이들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표로 말하는 정치과정 내에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자들의 발언력이 사회 극소수 지배블록의 발언력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이라기보다는 회사의 주주총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회사라는 조직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1인 1표가 아닌 1원 1표의 원칙이 통용되는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 속에서 인민주권이라는 말은 허상일 따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은 갈등에 관여하는 집단과 개인의 성격 및 수에 따라 갈등이 치환되기도 하며 갈등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 탄핵 안건이 제기 되었을 때 운집한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한나라당 및 구 민주당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손쉽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최대한 갈등을 사사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광범위한 여론을 동원하기 위해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사회화 된 갈등축을 중심으로 동원된 전국의 시민들의 합의결과가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인민의 주권이 보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이 그렇지 않음은 명약관화 하며 기존 정권에서도 사회적 의제가 인민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정규직법 개악과 한미FTA를 둘러싼 논란을 사회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시민사회 자신에 의하여 기각되었고, 시민사회는 스스로 버린 인민주권에 의해 배반의 시대를 맞이하는 실정이다.

 

 용산참사 직후 정부와 여당은 도심테러, 알카에다, 불법폭력시위 등의 격한 어휘를 동원해가며 법치 기강 확립을 천명하였다(이러한 어법은 지난 정권에서도 다소 온건한 형태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점을 상기하자). 하지만 국가의 형성과 작동방식을 마피아와 같은 조직범죄단의 활동방식과 비교했던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의 구분이 사실상 어려움을 지적한다. 정부는 특정 지역에서 매우 중앙집권화 된 강제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그 지역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구성원들에게 그 같은 수단의 사용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는 협박집단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그의 논지는 특정인에게는 정당한 폭력행사가 타인에게는 부당한 폭력행사라는 것이다. 거의 동일한 행동이 불법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 양 측에 모두 걸쳐 있으며, 단지 정치적 판단만이 그것을 구분 짓는다. 요컨대 국가 자체가 본질적이고 신성한 도덕성을 담지하지 않는 이상 국가에 의하여 행사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공권력의 행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적인 법에 의하여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며 법은 사회의 제반 세력들의 이익을 광범위하게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법은 지배블록의 이익을 위한 일방적 규범 이상이 아니게 되며 이에 의해 행사되는 공권력 역시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폭력에 의한 타도대상일 뿐이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준수하여야 한다는 법실증주의자들의 규범적 논리와는 달리 현실에서 법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법을 준수할 때 가지는 인센티브가 존재하여야 한다. 법치주의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되는 말은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의 지배가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사회집단간의 세력균형에 기반하며 상충하는 이익들 간의 공존틀로서 작동한다면 법에 의한 지배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을 확대하고 지배블록의 이익 실현에 복무하는 퇴행적인 형태이다. 법의 지배는 기본적으로 원활한 정치과정을 위한 전제 조건이며 정치는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법이라는 합리적 규칙을 수단으로 하여 조정하는 과정이다. 합의와 소통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과정을 도외시 한 채, 법이라는 물화된 규범만을 강조하며 그에 당위적으로 복종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강제적 질서를 부여하는 법에 의한 지배에 불과하다.

 

 용산참사에서 나타난 정부와 사법부의 행태는 전형적인 법에 의한 지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일정 시기 법의 집행자들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시기에 탈법적 행위를 저지른 특정인이나 집단에게는 이익이 된다. 용산에 망루가 설치되기 전 치외법권 상태에서 이익을 보았던 세력은 누구였는가. 철거민들의 농성에 대한 법적 규정에 대해 비전문가로서 비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겠지만, 최소한 법의 적용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사법부와 경찰에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1918년과 1922년 사이 독일에서 우익 투사들이 308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11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반면, 좌익 투사들은 21건의 살인 사건으로 3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2009년 검찰의 구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극우 반동세력의 집권을 열어주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법부를 연상케 한다. 일반적으로 법의 적용 및 판결에는 사법부의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 특수이익으로부터의 자율성, 사회에 대한 책임성이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용산에 대해, 그리고 사회의 피억압 계층에 대해 위의 세 가지 요소가 최소한 중립적으로 작용하였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법의 지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지배자 혹은 지배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힘을 법에 종속시켜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법은 예측 가능한 합리성이라는 속성을 사회 강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권력행사 유혹에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용산참사를 둘러싼 지배블록의 행태는 법의 지배를 가능케 하는 요건들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굴욕감을 안겨주고 싶은 유혹을 좀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부자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지배계급이 합리적이라면 피지배계급에게 일정한 정도의 지분을 양보함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분노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부르주아와 이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국가권력은 자신들의 몫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경제적 약자 계층에 대해 정치를 통하여 파이를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혜와 치안 중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보이는 무소불위의 오만함은 힘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즉각적으로 폭발하는 증오심을 자극한다.

 

 최근 서울시는 14곳의 뉴타운 사업을 ‘속도전’ 으로 강행한다고 발표하였으며 심지어 참사가 발생한 용산 4지구 개발조합은 세입자를 위해 짓도록 되어있는 임대아파트 건축을 피하고자 하는-수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소송을 내기까지 하였다. 이에 비하면 경제적 문제를 확률의 문제로 치환시킨 정부의 철거민 대책은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넘겨 보아줄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 지배계급의 이와 같은 뻔뻔함은 일종의 기억상실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정부가 관리하는 자원, 즉 토지와 경제적 잉여가 영세 상인들이 제공한 것이며, 자신들 역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제구조 속에서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이러한 기억상실증을 지적해줄 정부 역시 함께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집권은 사회의 대다수 가난한 자들의 투표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도외시하고 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현재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율은 월 소득 100만 원 이하의 계층에서 46.9% 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참여정부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계층일수록 그 배신감 역시 큰 법이다.

 

4. 정부를 찾아 나선 6명의 시민들

 

 지금까지 다루었던 문제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 의한 쁘띠 부르주아의 무산화 2. 건설자본과 합작한 정부에 의한 강제적 무산화 3.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정부 차원에서의 정치적 배제. 갈등의 범위는 후자로 갈수록 넓어지며 따라서 뒤쪽의 문제일수록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여론의 상당수가 용산참사에 대해 동정적이더라도 용산참사 이후 각각의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는 역시 정치의 무능에서 기인한다. 지배블록이 제 3자 개입 금지 조항 등을 통하여 갈등의 사사화를 유도한다면 저항블록은 최대한 광범위하며 시민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갈등축을 만들어내어 자원을 동원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제기되는 ‘살인정권’ 등의 주장은 특정 정치세력을 악마화 하여 모든 것을 그의 악의에서 기인한 것으로 치부한 채 특정 정치세력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저항블록이 공허한 최대강령적 구호만을 외치고 있는 사이 대기업은 단가 후려치기 등의 저질 상도덕을 무기로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미 종래의 재래시장을 괴멸시킨 대형 마트 시장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대기업은 최근 대형 슈퍼마켓 사업에 진출하여 ‘구멍가게’ 의 매출을 50% 이상 떨어지게 만들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매출 감소만이 아니다. 대기업의 진출로 인해 상권이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은 인근 상가의 임대료를 상승시키고 매출마저 감소하는 처지의 영세 자영업자 입장에서 상승하는 임대료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다. 또한 현재 서울의 뉴타운 상황은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 시절 추진한 것만 하더라도 1차 3곳, 2차 12곳, 3차 11곳 등 총 34곳 184개 구역에 이른다. 이 지역들의 세입자는 모두 21만 6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72.4 %를 이루며 이 중 80% 이상이 상가 세입자, 즉 용산의 철거민들과 같은 처지이다. 이미 경기 용인시에는 세입자 15명이 현실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세운 망루가 1년째 서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와 전문성은 다소 의심스러우며 서울시 당국은 적반하장으로 뉴타운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정치적 대안의 부재와 합법적 소통구의 차단, 죄여오는 생계의 압박은 결국 부르주아와 몰락 위기에 처한 쁘띠 부르주아 간에 노골적이고 격렬한 계급투쟁을 야기할 가능성을 부상시킨다. 이미 지역의 영세상인들 사이에서는 ‘폭동이 왜 일어나는지 알겠다’ 는 한숨 섞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찰스 틸리는 반란이나 혁명과 같은 집합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탈법적 개인이 아닌,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조직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용산참사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전철연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마지막 대안으로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별개로 맑스는 단순히 불이익에 대한 반발인 즉자적 계급의식이 계급투쟁을 선도하는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전이되기 위해서는 공장과 같은 모임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철거촌의 좁은 망루들은 이미 훌륭한 계급적 증오의 재생산지이며, 전국적 연락망을 갖춘 전철연과 같은 조직은 각지의 망루들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공유시키고 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의 기획이 성공하여 서울은 거대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도시가 된다면, 서울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이 쫓겨난, 서울 외곽의 지역에서는 자연스레 내쫓긴 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의 상황이 노골적인 계급투쟁을 버텨낼 정도의 체력이 되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계급투쟁을 통해 어떤 계급이 승리하든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고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 무기력증 및 혐오증이 광범위하게 독처럼 퍼져있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 혁명에 참여하길 기대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기에 그래도 좋은 정치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1929 년 대공황에 직면한 후 절대적인 생존문제가 주된 관심사로 부상한 미국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본격화 되면서 국가와 기업을 무시한 채 노동자들 스스로가 공장의 생산수단과 물물교환을 통해 생존을 유지하는 자조(self-help)운동이 사회 전역을 휩쓸었다. 공화당 행정부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강경책을 구사하였지만 이어 집권한 루즈벨트 행정부는 뉴딜 정책을 통해 자조운동이 가지고 있던 정부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그 강력한 에너지를 미국 사회 내부로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와그너 법(Wagner act)의 통과는 계급간의 갈등을 정치과정 내에서 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북부의 공업자본과 남부의 농업자본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무력으로 대립하였던 남북전쟁과 같은 계급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정치는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손을 놓고 한탄하거나 혁명적 수단을 찾아보기 전에 보아야 할 것은 지난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은 40%의 사람들이다. 투표를 하지 않은 책임을 인민의 무지와 무관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유한 계층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태이며 이는 피지배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던 논리이다. 그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갈등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선택지와 대안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이들의 억압된 갈등을 가시화 하여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국회의사당에서 들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용산참사가 낳은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은 기존의 철거투쟁에 대해 과격성을 이유로 외면하던 시민들이 철거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철거민의 수는 전 국민의 수에 비하면 소수이기에 이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축이 형성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에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의제는 훨씬 광범위해지며 이것은 철거민뿐만 아니라 균열축을 둘러싼 갈등에 동원된 모든 시민들의 이익까지 포괄할 수 있다. 이념적 순결성을 만족시키고 투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최대강령적 운동이 아닌,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실재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세심한 정치가 필요하다.

 

 물론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하며 특히 철거가 아닌 대자본의 상권장악에 의한 쁘띠 부르주아 계급 자체의 몰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아직까지는 정치의 힘이 다소 모자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정치라 하더라도 그동안 왜곡된 형태로 지속되어 왔던 자본과 정치의 힘의 역학구도를 단번에 뒤바꿀 재간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몰락한 계급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다른 방식의 삶을 찾아 나서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좋은 정치에 대한 모든 희망과 노력을 포기하고 모두가 냉소의 품으로 도피한다면 언젠가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가득 찬 서울에서 나가는 방향의 톨게이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를 지나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여기서 나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Posted by 데학생
광대의 사회학2009/01/10 18:52

진보신당 학생모임 내부의 문제 때문에 쓴 글입니다만 논쟁을 정리하는 1부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1부 교통정리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1. 교통정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의 시발점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에 대한 권병덕 님의 비판입니다. 코스프레와 같은 집회, 장학기금 조성,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은 소위 '운동권' 의 이미지 개선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근거 부실을 이유로 반지성주의라는 지적을 하였고, 최광재 님은 이에 대해 '창조적 파괴' 를 내세우며 재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권병덕 님이 지적하시는 부분과 최광재 님의 반박은 서로 맞물리지 못하고 있기에 일단의 교통정리가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다시피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을 구체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지성주의로 규정 하였습니다. 금다니엘 님의 평소 언행을 모르는 저로서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이 불성실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적극적으로 이론과 성찰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현실정합성이 결여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지점이 있겠고 저러한 제안이 반지성주의로 발전할 만한 소지가 있지만 그러한 제안 자체를 반지성주의적-정책팀을 축소하자는 정도의 제안이라면 충분히 저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최광재 님은 권병덕 님의 반지성주의 규탄에 대해서 '창조적 파괴'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반박을 하였지만 이것이 과연 권병덕 님의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최광재 님의 반박에는 '창조적 파괴' 의 구체적 내용(최광재 님은 결과가 투입비용보다 크다면 창조적 파괴가 용인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대차대조표를 성실하게 작성하라는 권병덕 님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습니다)과 그것이 어떻게 지성보다 우월할 수 있는지, 혹은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 창초적 파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논증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권병덕 님의 비판의 핵심이였던 '지성' 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쟁점인 명동 당사 이전에 대해서는 최광재 님이 반박 지점을 제대로 짚어 주셨습니다. 양 측의 주장을 요약해보자면 권병덕 님은 부지비용 및 기자들의 접근성,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보량의 이점 때문에 당사 이전을 반대하며 최광재 님은 대중들과의 직접적 접촉 가능성 때문에 당사 이전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을 지켜보는 분들이 각자 주관에 따라 현실정합성을 따져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이 당사 이전의 찬성 논거로 내세우는 부분, 즉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관점의 기저에 깔려있는 정당관의 문제입니다.
 
2. 일반의지와 정당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개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회계약론>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민권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그것입니다. 루소는 사회를 개별의지와 집합의지, 일반의지의 세가지 층위로 구분합니다. 개별의지는 개인의 의사이며 집합의지는 이 개별의지들의 단순한 총합, 그리고 일반의지는 집합의지의 본질을 이루는,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단일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주권을 왕이라는 개인에게 집약시키는 보뎅 류의 왕권신수설의 사상적 얼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격적 주권론(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긍정적 술어가 아닌, 주권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지칭합니다)의 흔적이며, 사회의 단일한 이익과 의지가 존재한다는 일반의지의 개념은 자신들이 일반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단일정당이나 개인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정당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은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의 가장 중요한 이점으로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뽑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그 대중이 어떠한 대중이며 이들과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단 두 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두 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보정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최대한 자주 하는 것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지당한 말입니다. 문제는 소통의 방식입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의 상당수는 대중의 일반의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는 식의, 신과 인간 사이의 법열(法悅)을 방불케 하는 신학적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그 자체로서의(sui generus) 사회' 로 전치시키며 '사회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파 정당이 주장하는 허구적인 국민통합이 아닌,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체제를 전제로 행동하는 진보정당이 사회유기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단일한 질(質)로서의 대중을 가정하며(이는 파시즘의 주요 특징입니다) 그들의 단일한 일반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자세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 '서민' 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서민들의 단일한 이익이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 적대적인 계급의 투쟁의 역사라는 맑스의 도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현대사회의 특징은 기능과 이익의 분화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일반의지의 존재여부에 대한 증명이 선행되지 않은채 일반의지와 직접 접촉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것은 소모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질(質)로서의 서민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발상은 현실정치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하지만 인민에 의한 직접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슬로건에는 부합하는 일종의 레토릭 혹은 신화적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균열선을 따라 분열되어 있는 인민의 열정을 지배적인 모순을 축으로 규합하여 그것을 제도화된 형태로 정치영역에서 풀어내는 조직입니다. 이 과정 중 한가지만 결여되더라도 그것은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대중과의 직접적 소통을 강조하는 분들은 인민의 열정을 정제하고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것을 규합하여 정치외적인 혁명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뉘앙스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코뱅 독재부터 스탈린 독재까지 좌우를 망라한 전체주의 정권들의 공통점은 '인민의 일반의지' 와 '지도자' 혹은 '변혁' 의 직접적 대면을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정당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호자주의이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의 일반의지와 실제 일반의지(존재한다면)가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정당 모델은 크게 전문가 정당과 대중 정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이념형은 전자가 선거 전문가에 의한 '지지자' 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포괄정당이라면 후자는 뚜렷한 정강과 정책방향을 가지고 기층 당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정당입니다.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전문가 정당 모델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폭넓은 당원층을 기반으로 당원들간의 소통에 기반하여 당의 정책 수립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대중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전문가 정당은 본질적으로 득표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과 정당 자신이 변증법적 관계를 통하여 서로 바뀌어나가는 것이 힘들며 정치공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집권을 목표로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100% 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가 아닌, 이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모순을 균열축으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규합함으로써, 50%의 지지율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통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자면 정당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층위에서 활동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의 소통은 기층 당원이 담당할 일이지 당 사무실 이전 등을 통해 당 공식기관이 나설 일은 아닙니다. 당 공식기관이 할 일은 기층 당원들이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얻어온 정보들을 규합하여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정책을 만드는 '정치적인' 일입니다. 당원들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당의 위세를 위해서가 아닌, 일반 대중과 당 사이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며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소통의 방식은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해서는 일방적인 계몽 혹은 얼굴도장찍기 이상의 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당으로서는 피드백을 받을 방법이 부재합니다. 요컨대 '현재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는 자위 이상의 것이 나올 수 가 없습니다. 서로 층위가 다른 개별 대중과 정당 사이에 진솔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개별 대중이 아닌, 단일한 질로서의 대중의 일반의지를 당의 직접 접촉을 통해 읽어내겠다는 식의 발상의 무익함 역시 딱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반의지' 를 등에 업고 '헤게모니 투쟁' 과 '지적 압도' 없이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저는 저 두가지 방법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선거를 통하여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생디칼리즘 적인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의주의가 아닌 냉정한 계산에 의한 정치입니다.
 
3. 운동을 넘어 정치로
 
 현재 진보정당에 몸담고 계신 많은 분들이 운동단체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보수 양당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진보정당의 활동영역과 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이 상당부분 겹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가 굳이 분리되어 각자 존재하는 이유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열정을 여과없이 힘으로 전화(傳化)하여 정치외적인 압력을 통해 모순을 일거에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정당은 열정을 제도적으로 정제하여 정치영역 내에서의 경쟁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보다시피 양자의 작동 방식과 목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당을 통해 일거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급격한 변화에 맞서 대자적으로 조직된 관료층 및 기존 헤게모니의 저항에 부딪쳐 좌초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혁명과 같이 정치외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굳이 그 매개체로 정당을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정치를 통한 변화는 골치아프고 큰 효과도 없어 보이지만 가장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단지 급격한 변화 자체만을 원한다면 진보정당 활동이 아닌 아나키즘 혹은 볼셰비즘에 투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혹은 변동 자체에 의해 낙오되는 약자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정당은 가장 효과적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회운동은 그것에 투신할 수 있는 자원 혹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 사회에 인민대중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원한다면 그것은 인민의 일반의지를 읽어냈다는 독단을 가진 혁명투사가 주도하는 일방적 개혁이 아닌, 당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정책을 가다듬고 의회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의 의원들과 부단히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하여 정치과정에 뛰어든 이상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역시 지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직되어 있는 헤게모니에 비조직적인 대오로 뛰어드는 것은 어떠한 성과도 거두기가 힘듭니다. 요새들어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리더십은 좌우를 불문하고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10월 유신과 산업화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역시 김일성이 없었다면 주체사상은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북한 체제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권력과 정치에 대해 통찰력 있는 많은 연구를 수행한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지나친 관료화로 민주주의가 고사하는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희구했을 정도이니 정치에 있어서 리더십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필수적인 요소를 무조건 터부시하며 배척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기존의 의회 정당정치에 대해 '여의도 정치' 로 폄하하는 것은 2MB 대통령의 후보시절 발언에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과 신자유주의 노선의 기묘한 동거가 발생합니다. 진보적 학자였던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한 보수적 학자 뒤르켐의 사회에 대한 개념과 통하듯이, 그리고 맑시스트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에 대해 나치의 법학자 칼 슈미트가 찬사를 보냈듯이 상황의 지나친 단순화는 극과 극을 통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저는 단순히 극단적인 것은 지양하여야 한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극단이 현실에서 어떠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정치에 대해 좌우에서 퍼붓는 맹공은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를 유발하여 한국에서의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기 힘들게 만들고, 이러한 정치의 실종이 다시 정치에 대한 회의를 재생한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과로 나타났다시피 이러한 악순환 구조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손만을 들어주었습니다. 정치의 실종은 '혁명적 좌익' 세력을 충원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대중을 규합하여 2MB를 직접 권좌에서 끌어내리자는 식의 해법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직접행동에 의한 혁명적 변화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타파하지도 못할뿐더러 수많은 희생을 낳기 때문에 정당을 선택한 우리들로서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보정당에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2MB 와 한나라당이라는 물화된 보수이념을 물리적으로 몰아내는 방법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히 새겨져 반동세력의 망령을 끊임없이 초혼하는 헤게모니적 인각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은 일거에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재편하는 신적 폭력이 아닌, 정당이라는 진지를 둔 지난한 진지전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운동의 열정을 등에 업고 정권을 쟁취한 노무현 정부가 관료와 재벌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간 이유는 그들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진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집권 후의 과정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닌 정치입니다.
 
 상상력 역시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진지한 성찰과 반성, 고민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떠한 실제적 효과도 낳지 못하는 감정의 발산으로 그칠 것입니다. 극단의 시대를 지나 침체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사랑하듯이 혁명한다' 등의 멋지고 요란한 구호가 나돌며 상상력이 발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정작 중요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7/08 19:12
  현대 과학의 최첨단 분야 중 하나인 양자역학은 다소 특이한 한계점을 전제하고 있다. 관찰행위 자체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관찰하는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굳이 복잡한 과학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전제는 아마 사회과학에도 적용가능 할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자신이 관측하고자 하는 계(System) 속에 속해있기에 관찰이 곧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미한 행위가 되듯, 사회과학자 역시 자신이 관찰하고 논평하는 사회 속에 속해있기에 그의 관찰과 논평 역시 사회 속에서 하나의 변수가 된다.
 
  현재 촛불 정국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성을 외치며 촛불에 대해 온갖 논평을 쏟아내는 지식인들과 상당수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 사회에서 관찰자와 행위자를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에 한정 지으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무형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들이 행동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잃을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사명감뿐인 학생이 이미 가족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정의를 위해 소유를 내려놓으라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썩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이는 성숙하지 못한 행위이며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아도르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문제는 '편향적' 인 행위자와 스스로 구분을 지으며 '객관적' 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구세력의 신성동맹이 내는 반동적 목소리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후자가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과 정서과잉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가 없는 코미디로 수용된다면 전자는 세련된 외양을 무기로 공론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목소리 자체로 현실을 재창조한다. 현재 촛불정국에 대한 여론은 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의 열정적인 체험담 외에도 수많은 관찰자들의 목소리 또한 가미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론' 은 촛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행위를 하지 않는 관찰자들은 무엇을 관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들이 촛불집회의 모든 순간에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몇 번의 참여에 따른 단편적인 인상 혹은 언론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현장의 최전방에 있던 자만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책임감 없이 단편적 이미지에 휩쓸려 아우성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반동적 언론에서 주어진 이미지에 휩쓸리는 목소리들은 가장 위험하다. 이들 언론의 보도만 보자면 현재의 촛불 정국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혁명의 상황에 가깝다. 전경을 집단 구타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목소리는 혁명에 열광하는 목소리와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행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유혈 혁명에는 생래적 거부감을 지니고 있기에 촛불 정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반동적 언론들의 전략이자 '객관적' 관찰자들의 한계이다. 이들의 폭력비판은 공허하다.
 
  근본주의적 폭력비판은 실질적으로 소용이 없다. 기껏해야 전경과 시민 모두 잘못하였다는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누가 먼저 때렸나' 라는 검증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폭력적' 이고 '비이성적' 인 행위자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키며 '비폭력' 과 '이성' 의 영역에서 훈수를 둔다. 반동적 목소리들은 훈수의 재료를 제공한 뒤 터져 나오는 관찰자들의 세련된 훈수 뒤에 자신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숨긴다. 그리고 훈수가 행위자들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잠재웠을 때, 이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은 비수가 되어 관찰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행위자들을 찌른다. '일반시민' 들인 관찰자의 이름으로.
 
  여기에 관찰자들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순수하다. 시민에 대한 전경의 폭력과 전경에 대한 시민의 폭력 양쪽 모두에 분노하며 노무현의 악덕만큼이나 2MB의 악덕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노무현 정부 시절이나 2MB 정권 시절이나 '운동권' 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무감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사진예술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이미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듯, 맥락이 거세된 단편적 이미지는 이들의 순수함을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며 농락한다. 벤야민은 비판정신을 마비시키는 사진의 순간적 이미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표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미 반동적 언론들은 자신들만의 맥락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자제로 표제를 붙여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 안에서, 이들의 표제는 사진의 '진실' 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와 사진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동적 언론의 매트릭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수한 렌즈로 관찰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직접 촛불 집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수선한 집단 객기쯤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 시각은 더 이상 '객관적' 이지 않다. 아마 전쟁터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현실 정치 영역의 권력 게임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는 존재하기 힘들다. 행위자 혹은 자원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행위는 아니다. '과격 행위자' 와 '부정적 시선으로 관망하는 시민' 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나는,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중하고 올바른 관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사회참여 행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변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에 반해 순간적 이미지에 휩쓸려 감정적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객관적 관찰' 과는 거리가 멀며 어떠한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행위자들과 애초에 선을 긋고 무책임한 논평, 아니 감정의 배설을 쏟아내는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기성취적 예언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촛불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신중을 기해 말한 방향제시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허공을 맴돈다면 관찰자들의 목소리는 관찰자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이 되며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반동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포장하며 또 다시 관찰자들은 그러한 보도에서 '판세' 를 읽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에 맞춘다.
 
  거리에 나올 용기와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판단할 책임감 중 어느쪽도 갖추지 않은 채 '쿨' 한 척만을 하는 관찰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질 미래는 역시 차가운 미래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의 촛불 정국은 확실히 87년 6월과는 다르다. 하지만 87년 대선과 같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를 택일해야 하는 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 역시 순수한 선과 변혁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2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았을 때 '관찰자' 들의 상당수는 최소한 순수한 선을 택할 완고한 도덕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코를 틀어막고 2MB에게 투표를 하였다면 변혁을 위해 촛불의 몇 가지 소소한 악덕쯤은 감수하고 다시 한 번 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도 '나는 찍지 않았습니다' 를 무기력하게 외칠 것인가.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
망상의 변주곡2008/06/29 16:27

우선 원본 대국민 '협박문' 부터 감상을 하자.

http://www.frontiertimes.co.kr/news_view.html?s=FR01&no=28791&s_id=9&ss_id=0

자작 대정부 단독담화문

존경이 되지 않는 2MB 일당들!

어제 저녁, 또 다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과격 폭력 진압이 벌어져 시민과 경찰 양쪽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전경이 곤봉과 방패로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빈 소화기통과 보도블럭까지 시민들에게 던져댔다. 나아가 쓰러진 여성을 발로 마구 밟는 일까지 발생했다.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분노의 뜻을 표하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나와 부상을 당한 전의경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시민들은 그 동안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재협상을 주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한때 2MB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는 척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태도 역시 2MB의 사과문과는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쇠고기 문제 뿐만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경찰의 진압 양상도 날이 갈수록 과격 폭력화 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은 오늘 일요일, 개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위한 후안무치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그 동안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정부의 자정능력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노력하며 인내를 갖고 정권퇴진 운동을 최대한 자제해 왔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숙였던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주도의 MB노믹스의 강행, 80년대식 진압을 다시 꺼내들면서 급기야 어젯밤과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가 재발한다면, 시위에 참여한 일반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는 절대로 막아야 한다. 시민들로서는 불법 폭력 과격 진압에 의한 불행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소화전을 이용하는 등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격 폭력진압을 조장 선동하거나 극력 폭력행위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기록, 추적해 국민의 심판을 내릴 방침이다. 파괴된 방송장비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민사상의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망발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2MB 일당들!

이번 시위와 관련해 전의경들의 부모이자 친구인 시민들이 밤낮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젯밤에도 수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부상당한 시민들은 총 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10개가 넘는 농성천막과 140여 점의 농성장비도 파손됐다.

2MB의 집권이 네 달이나 계속되면서 자영업은 물론 우리 경제 전체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국가신인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외국 투자자와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전 세계가 유가급등으로 위기에 몰려있고, 특히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2MB가 대통령으로 있을 경우 누가 우리나라에 믿고 투자하겠습니까?

2MB의 집권은 서민경제를 죽이는 일이고, 그 피해는 묵묵하게 일하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이런 현실은 아직까지도 시민들께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균형있는 보도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들이 시민들께 전달될 수 있도록 조중동의 회개를 당부드린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시민들의 고충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실 것을 거듭 요청드린다.

또한 한나라당도 개념없는 성명서를 철회하고, 미 쇠고기 재협상을 즉각 당론으로 정하기 바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민의를 대변하여야 할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 시키는 데 역량을 모아나가야 할 때다.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정책을 수행하는 성숙한 국가 운영역량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국제2008/06/12 12:00



 평소 CNN 등의 사이트에 한국은 '아시아 뉴스' 로 묶여져 있으며 그나마도 별 뉴스가 나오지 않던 전례를 보자면 이러한 보도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서구인들이 민주주의를 소비하는 방식을 상기한다면 이는 결국 또다른 서구 중심주의의 반복으로 보인다.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었고 보편의 가치가 된 사회에 살고 있는-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서구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혁명은 일종의 '로망' 에 가깝다. 얼마전 사학법 및 종교인 과세 논란이 벌어졌을 때 광신도들이 벌이던 '순교' 퍼포먼스와 같은 맥락선상에 닿아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신화의 영역에 있는 사도들의 순교에서 뜨거움을 느꼈다면 '민주주의 신도'(비꼬는 의미는 아니다) 가 된 서구인들은 역시 신화가 되어버린,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뜨거움을 느낀다.

 87년 6월 항쟁의 열정을 경험적 차원에서 되살리던 한국의 386세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서구인들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을 신화의 차원에서 소비한다.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구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라파예트와 제퍼슨을 방불케 하는 민주주의 혁명 신화의 살아있는 주인공이였던 것이다.

 결국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산업화' 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과 '야생의 에너지' 를 읽어내듯, 아시아에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주주의 혁명' 의 신화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소비방법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현재 국면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 시위를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단순한 '반미' 차원에서의 운동으로 보는 것이 아닌, 2MB 정부의 정책방향과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로서 서술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배후설을 운운하는 조중동의 기사보다 훨씬 정확하다. '반정부'(조중동은 2MB 정부에 대한 반대와 정부라는 체제 일반에 대한 거부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악습이 있다) 혹은 '반미' 가 아니라 '민주' 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내면에 공고화되지 않은 국내 파시즘 언론들(우파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보다 해외 언론의 민주주의에 대한 로망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역설이 발생한다. 외신을 보는 것은 제 3자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그 장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펜이 아닌 푸른 눈 속에서 우리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에서 발췌-

For the past 40 days, central Seoul has been rocked by demonstrations , which began as rallies by hundreds of teenage students, singing, dancing and holding candles to protest the importing of American beef. They have now evolved into a protest against government policies on education, health care and consumer prices.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