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사회학2009/06/24 22:59

요약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반영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정치적 반영, 과도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 정책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같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집권 과정부터 집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정당정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퇴행시키며 스펙터클에 의한 동원참여를 이끌어 내는,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에 의존하였다.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욕망에 충실한 한국의 중간계급이며 이들은 노사모  · 촛불과 같은 동원참여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정치적 정서를 표출해왔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에서 나타나는 정서 역시 노무현의 실제 정책과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정치적 평가보다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동일시 대상의 죽음과 영결식의 패전트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참여는 반정치적 정서를 재생산하며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독으로 작용한다.


 이 글의 목적은 노무현 추모 열기라는 현상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나 단편적 분석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라는 통시적이고 거시적인 과정 내에 현상을 위치시키고 바라보는 데에 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이명박과 같은 개인의 가치관이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당정치 구조의 부실과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다. 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협애한 이념적 대립 축을 중심으로 갈등하는 정당체제는 인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며, 다원주의 없는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최장집, 2005).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어가던 시점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헤게모니와의 대면과 타협,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의 덫에 갇혔으며 사회적 갈등의 발현을 억압하는 통합이데올로기, 과도한 도덕주의, 민주적 가치와 위배되는 전문가주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도한 도덕주의를 내세운 정당개혁과 리더십의 문제는 오히려 정당과 시민의 연계 고리를 파괴하였으며, 헤게모니와의 타협과 통합이데올로기에의 포섭은 정당의 갈등축을 흐리게 하여 전반적인 정당구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최장집, 2006: 75-91).

 

이러한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선택하였던 방법은 정당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 즉 스펙터클을 통한 대중의 동원참여(박동진 외, 2006: 64)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웠던 정치적 스펙터클의 전형은 지역주의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경제적 갈등 축을 직접적 대변하고 돌파하기 보다는 초지일관 ‘지역주의 타파’를 제일의 정치적 동원기제로 활용하였고, 더 나아가 지역주의 문제를 참여정부의 정치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강병익, 2007a: 88). 하지만 지역주의 문제는 한국정치의 근본모순을 구성하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갈등축의 억압에서 기인한 종속변수일뿐더러, 이에 대처하는 노무현 정부의 방안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박상훈, 2005). 더욱이, 노무현 정부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제안한 정책들은 지역주의의 해소보다는 대부분 당시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각주:1]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는 진영이 명확하고 도덕적 열정을 추동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이끌어냄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열정적 동원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스펙터클의 구체적 결과가 체감되지 않을 시에는 오히려 참여자들에게 피로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줌으로써 냉소주의를 심화 · 확산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의 축을 재정의 하는 데에 대규모의 정치자원을 투입함으로써 사회의 근본모순을 규정하는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억압하고, 스펙터클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샤츠슈나이더, 2008). 이는 도덕적 열정에 의한 스펙터클에 대한 중간계급[각주:2]의 매혹,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대변하지 못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혐오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반하는 반(反)정치주의로 귀결된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는 지역주의나 탄핵 문제와 같은, 진영이 전국적 규모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하고 이에 대한 도덕적 열정을 동원하는 방식의 정치를 시행하였지만, 담론과 실제 정책의 내용은 괴리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에 의한 정치는 정치적 스펙터클의 강력한 동원자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반정치적인 경향으로 귀결되어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가 연출한 정치적 스펙터클을 도덕적 스펙터클로 받아들인 중간계급이다. 중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의 확대와 중간계급 의식을 반영하는, 철학과 가치관이 결여된 절충적 · 덕담 수준의 지속적인 ‘욕망의 정치’ 의 확대는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귀결을 방증하고 있다(강병익, 2007b).

 

촛불을 거쳐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드러난 일련의 흐름은 위와 같은 계급 편향적이면서도 보편담론을 표방하는 중간계급의 허위의식이자,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와 심정윤리만을 강조하는 반지성주의 및 반정치주의의 포괄적인 총체이다. 촛불은 환등상(phantasmagoria)으로 어른거리다 사라진 근대성의 그림자이자 거대한 스펙터클로서 도시의 중간계급을 유혹하는 욕망의 기제였다(이택광, 2009). 또한 유사과학과 괴담에 의해 추동되고 이론의 빈곤을 배태하고 있는 반정치주의와 탈정치화의 통로였다(백승욱, 2009). 촛불을 통해 나타난 흐름은 이른바 ‘촛불시민’ 이 다시 거리로 나온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노무현의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냉정한 이론적 고찰은 사라진 채 유시민 전 의원 류의 유사이론(유시민, 2005)에 의거하여 진중권 중앙대 교수,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와 같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규탄과 성토가 나타났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 라는 이름이 삼성경제연구소의 아이디어라는 점과 노무현과 이학수의 개인적 유착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고 있지 않다.[각주: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그가 생전에 동원하였던 지역주의, 개헌 등과 같은 스펙터클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얽힌 내러티브와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상징 및 이미지가 정치적 공간을 혁명적으로 재편한다. 이는 후보의 정강 대신 현직 의원의 기록에 투표하는 경향, 의사소통 기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미디어적 인물(media figure)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현상의 반영(마넹, 2004: 266-269)이다. 정당의 이합집산은 스펙터클이 될 수 없지만 정치인 개인의 죽음은 거대한 스펙터클이 된다. 이 시점에서 정치는 다시 스펙터클로 환원된다. 이명박 정부는 세심한 정책적 비판의 대상이 아닌, 선과 악의 결전이라는 스펙터클한 구도 속에서 타도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상정되며, 정치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영논리와 십자군적 열정에 의해 재배치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이러한 감정적 스펙터클이 물질적 패전트로 물화(Reification)됨으로써 스펙터클의 정점을 이루며, 그 동원효과를 극대화한다.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記意)를 학습시킨다. 하지만 권력의 기의는 패전트를 연출하는 현실권력의 의도대로 각인되지는 않으며, 대중이 패전트에서 경험하는 것은 현실권력의 ‘성격’ 이 아닌 권력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경험한 대중은 권력의 기표(記標)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죽은 노무현은 일본 근대 초입, 메이지 천황이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랬듯 영결식을 통해 순행(巡行)을 실천하였고 시민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시민들은 여기서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며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후지타니, 2004: 301-30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통상적 반응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분명 의사(擬似) 수호자주의이며 현실 정치의 원칙으로 삼기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달, 2006: 112-168, 301-30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이명박 전선’ 으로 결집된 정치권은 노무현 추모 열기를 정치적 자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노무현 추모 정국에 동참하는 대부분의 중간계급은 스펙터클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 이라는 통합 이데올로기에 의한 진영재편은 배제되고 억압된 계급에 대한 동정과 멸시의 자세로 표출되며 이는 실질적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현대정치의 특징 중 하나인 욕망에 의한 정치에 대한 급격한 반동은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과도한 도덕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며[각주:4],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욕구의 반지성주의적 표출은 정부의 대내 자율성을 저해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파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보비오, 2007: 126-132).

 

정리하자면, 현재의 노무현 추모 정국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평가나 정책적 고려가 결여된 채 이루어지고 있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자 반지성주의, 과도한 도덕주의, 의사 수호자주의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이명박의 좋은 아버지(buon padre)버전에 불과하다.[각주:5] 따라서 노무현에 대한 추모 열기는 결코 특별하고 위대한 도덕성의 표출이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의 연장선상에서 국면적으로 발현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갈등축을 폭력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사회의 진정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열정의 동원참여에 의한 최대강령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이성적 과정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기여를 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열망과 절망의 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더욱 깊게 재생산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파국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징후이다. 

 

참고문헌

 

강병익a,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의 리더십”,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창간호 pp.77-90

______b “철학도 실체도 없는 보수정치의 중도론”,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5 ․ 6월호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 2004

달, 로버트(Robert A. Dahl),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 지성사, 2006

마넹, 버나드(Bernard Manin),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박동진 외, 『인터넷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박상훈,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2일자

백승욱,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보비오, 노르베르토(Norberto Bobbio),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2007

샤츠슈나이더.E.E.(Elmer Eric Schattschneider), 『절반의 인민주권』, 후마니타스, 2008

시사IN, ‘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2007년 11호

유시민, ‘나는 더 중요한 정치인 되고싶지 않다’,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6일자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

______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______ “촛불의 매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______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연세대학교 시국토론회 발제문

  1.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이 도입하려고 하였던 전두환식 2인 중선거구제도는 지역주의 해결에 대한 노무현 정부 및 집권여당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중선거구제는 사실상 비례대표제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STV식(아일랜드에서 사용)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용하다 폐지한 SNTV식을 도입을 주장한 건데, SNTV식 중선거구제는 단순다수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보다도 못한 제도이다. 또한 비례대표제 역시 노무현의 주도가 아닌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스펙터클화하여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중선거구-이원행정부제 논의는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본문으로]
  2. 중간계급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이택광,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과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를 참조. [본문으로]
  3.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서다가 좌초한 노무현이라는 신화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삼성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집권기간 전반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며, 삼성 X 파일 사건에 대해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가운데 도청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 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행태로 일관하였다(‘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시사IN, 11호). [본문으로]
  4. 흥미로운 점은 중간계급의 도덕주의는 청교도적 금욕주의 보다는 ‘욕망의 평등’ 에 대한, 분배적 정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의 정치적 휩쓸림은 이명박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던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편입 욕망이 좌절되자 욕망의 평등이라는, 즉 각개약진이 실패하자 일종의 연대전술을 취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연대는 그들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부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로 귀결된다. [본문으로]
  5. 어청수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기용되었으며, ‘명박산성’ 은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회의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행 집시법 역시 노무현 정부의 유산이다. 또한 임채진 검찰총장 역시 노무현이 두둔한 ‘삼성 장학금’ 검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무현에 대해 신화가 만들어지고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것은 유사역사가 가지는 판타지에 대한 매혹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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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세상/사회2009/05/31 17:02




1.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를 학습시킨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맛본 대중은 권력의 기표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미끄러짐이 존재한다. 근대 일본에서 나타난 천황의 패전트를 분석한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에는 패전트에 대한 당시 대중의 반응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스펙터클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기표는 천황으로 수렴되지만 권력을 상상하는 방식이 각각 다른 것이다.

 2MB 가 국장이라는 화려한 패전트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한 권력의 기의와 대중이 읽어낸 권력의 기의 사이에는 탈구조주의적인 미끄러짐이 있다. 금요일의 시청과 연화관에서의 패전트는 매우 전형적이었으며 그만큼 대중도 전형적으로 반응하였다. 마치 메이지 천황의 순행(巡行)을 대하는 당시 대중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영결식은 국가의 규율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느낀 권력에 대한 느낌을 표출하는 장이었다. 이러한 패전트를 주관한 2MB 정부가 대중에게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결국 이 모든 패전트는 공식적으로는 정부의 주도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노무현의 패전트, 화려한 대통령 노무현의 패전트였다. 죽은 노무현은 영결식을 통해 순행을 실천하였고 대중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대중은 여기서 노무현의 존재를 새삼 느끼며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어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
 



2.
 유시민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2MB 는 네로 황제가 되기로 작심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의 만신(萬神)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배의 장소로 콜로세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콜로세움은 곧 2009년 서울의 거리이다.

 콜로세움 밖으로 나와 관중석의 귀족들을 공격하지 않는 한 노예에게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스파르타쿠스가 거리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3.
 촛불과 노무현에 대한 추모열기의 정체성을 이처럼 잘 대변해주는 사진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촛불과 노무현은 모두 태극기라는 기표로 용해 가능하다. 정상국가를 향한 중간계급의 허위적 열망과,  이에 대해 공권력을 투입하여 당신의 국가에 대한 기획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2MB 의 대립은 이 한장의 사진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싸움은 곧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싸움이다. 하지만 양자 중 어느쪽이 승리하더라도 희망은 찾기 힘들다. 중간계급이 꿈꾸는 정상국가는 정치적 수단에 의한 계급의 공존과 전략적 연대가 아닌, 도덕적 당위 혹은 중간계급의 안락한 환상에 기반한 몰계급적인 통합(곧 국가라는 기표로 모든 것을 용해시키는)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2MB 가 꿈꾸는 계급사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0/19 00:11

 지난 5월부터 7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촛불은 거리를 가득 메꾸었고 이는 한국 시민운동사에 거대한 이정표로 남았다. 하지만 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터져나온 촛불의 열정을 받아 지속적인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국가에 왼손을 새겨넣을 수 있는 제도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촛불은 쏟아지는 장마에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촛불의 열기에 대한 2MB 정부 및 반동 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이 가해지는 지금, 촛불 2기가 출범하였다.

 "한국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촛불이라는 유령이. 2MB과 강만수, 조중동과 강부자 등 한국의 모든 반동 세력들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얻을 것이 많은 대신(그것이 전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잃을 것도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촛불 2기의 미래는 다소 비관적으로 보인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종로에서 공부를 하다가 밖이 시끄럽길래 상황을 확인하고 잠시 교보문고에 들린 후 집회를 지켜보았다.


깃발들이 많이 있지만 일반 시민들의 수도 생각보다 많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모여서 놀랐다. 물론 예전의 촛불을 생각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이미 거의 끝장을 본 촛불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기륭전자 노동자 분과 촛불정국때의 일을 빌미로 면허를 박탈당한 운전자 분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런데 무대를 보니 예전과는 다른 구호가 적혀있었다. '뉴라이트 해체하자!!' '대안 교과서 찢어버리자!!'. 2MB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직접적 비판 보다는 그 이데올로그인 뉴라이트를 타겟을 삼은 듯 하다. 곧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라는, 예전 촛불정국 때부터 활동했던 단체의 회원이 나와 민족을 위해 일한, 자그마치 안중근 '장군' (이 분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는 당시 일본의 지배적 이념이였던 '아시아주의' 를 더렵혔다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과  윤봉길 의사가 어떻게 '테러리스트' 가 될 수 있냐고 열변을 토하였다.(알카에다도 다 자기 민족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그러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가치판단어가 아니라 서술적 용어이다. 독립군 활동을 한 안중근은 주 활동이 테러가 아니였으므로 테러리스트로 분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윤봉길은 테러리스트 맞다. 명심할 점은 테러는 전략적 수단이지 절대악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역사교사의 뉴라이트 규탄이 이어진 후 사회자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를 찢은 후 화형에 처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이영훈과 안병직 교수의 논문을 태웠다면 모를까, 정치적 의도로 서술된 대안교과서를 태우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하지 않겠다. 하지만 뉴라이트에 대한 규탄은 분명 과잉 민족주의적이다. '친일 매국노' 라는 쌍팔년도 레토릭을 아직까지 고수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고, 공감 역시 전혀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에 환호하였다. 지식인의 비틀린 근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 뉴라이트는 힘에 대한 추구로 인해 비판받을 대상이지 '친일적' 이기 때문에 비판받을 대상은 아니다. 엄밀한 논의 없이 과도한 민족주의적 레토릭으로 뉴라이트를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브루스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지적했다시피 한국은 기형적일 정도로 민족주의에 경도된 국가이기 때문에 뉴라이트는 당분간 일종의 사회악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만약 2기 촛불의 주최측이 의도적 전략으로 뉴라이트를 타겟으로 삼았다면 헤게모니 투쟁의 대상은 적절하게 선택한 것 같다. 물론 그 투쟁은 이론적 엄밀성 보다는 대중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여 동원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뉴라이트의 역공세에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될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의 늪으로 빠지는 셈이다.

 만약 촛불 2기가 덜떨어진 민족주의자들의 열정에 끌려간다면 촛불의 미래 역시 암울할 것이다. 이렇게 갈 것이라면 차라리 끝내는 것이 낫다. 시민의 촛불이 민족의 촛불, 국가의 촛불이 되는 순간부터 촛불은 완전히 노무현의 신화로 후퇴한다.
Posted by 데학생
광대의 사회학2008/10/16 19:43

 이념의 대립을 벗어나 실용주의를 추진하겠다는 2MB 정부의 국정철학은 결국은 시장 근본주의로 귀결되었다. '시장 논리' 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모든 것을 차가운 경쟁의 얼음물 속에 담가버리는 정부의 행보는 유연한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주장대로 시장논리는 인류를 유토피아로 안내해줄 보이지 않는 손일까?

 시장에 대해 최초로 주목한 고전파 경제학에 따르면 시장은 독립된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기업, 노조, 소비자단체 등의 모든 형태의 집단은 모두 가격을 왜곡하여 시장실패를 낳는 주범일 뿐이다. 가격은 순전히 개인들의 완전한 정보에 근거한(즉, 누가 어떤 품질의 물건을 얼마에 생산하고, 어느 정도의 수요가 있을지 완벽하고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 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자동적으로 형성되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 으로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도출해낸다. 하지만 현실의 시장은 정보가 불확실하며 가격설정이 즉각적,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기업과 노조, 소비자단체에 국가까지 개입하여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아마 고전파 경제학이 말한 시장의 논리는 기업과 자본의 계급적 이익만을 보장하는 2MB 정부로서도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닐터이다.

 그렇다면 2MB 정부의 경제관과 가장 유사할 것 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은 시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이 '거래하는 장소(place)' 로서의 물리적 시장이었다면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은 '거래 메커니즘' 으로서의, '사회' 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차원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이자 원리이다. '시장' 과 '시장의 논리', '효율성' 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이 시장은 효용을 극대화 하고자 하는 개인과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보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효용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또 다시 정보 불확실성 및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문제가 돌아간다.

 2MB가 원하는, 효율성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완전경쟁은 완전한 정보가 전제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정보가 완전하지 않다면 소비자는 A회사의 물건보다 비싸지만 품질은 좋지 않는 B회사의 물건을 구매할 수 도 있을것이며, 그것은 가격의 왜곡을 유발함으로서 시장 전체를 교란시켜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효율성을 저하시킨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실의 시장은 개인 혹은 일개 기업이 파악하기에는 정보의 양이 무한에 가까울뿐만 아니라 공개되지 않는 정보 역시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화된 기업간의 무한경쟁이 이루어진다면 불확실성을 보완하기 위한 거래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이는 역시 효율성의 저하로 이어진다.

 따라서 정보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하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무시한채 단순히 인간의 이기심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래서 고전파,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를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신제도주의 경제학이다. 그들에 의하면 기업은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이며, 1. 불확실성에 대한 리스크가 클 때 2. 일의 성격이 지속적일 때 3. 일의 자산특정성이 높을때(즉, 호환이 힘들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복원을 페인트공에게 맡길 수는 없다) 경쟁이 아닌 안정적인 조직(organization)의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한다. 요컨대 정보가 불확실한 현실의 시장에서는 경쟁만이 능사가 아니며 오히려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를 요하는 일일수록 주체들을 무한경쟁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조직의 원리가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더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실증적인 예를 보자. 경제사회학자 웨인 바커는 흔히 완전경쟁이 이루어진다고 생각되는, '시장 중의 시장' 인 선물시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신뢰로 묶여있는 연합이 무한경쟁보다 더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시장은 오로지 완전경쟁에 의해서만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신화를 부수었다. 그렇지만 2MB 일당의 머릿속에 시장은 하이에크의 망령이 지배하는 상상의 나라로서 존재한다. 현실 시장의 다양한 운영방식들을 무시한채 자신들의 빈곤한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념형의 시장만을 앞세워 '시장 논리' 운운하는 것은 결국 시장에서의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물론 민노총을 때리며 전경련을 놓아두는 것을 보면 2MB 정부의 '시장 논리' 는 약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계급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에이전트로서의 2MB 정부의 본질이자 사명이다.

 핸리 폴슨 미 재무부 장관은 미국의 주요 은행장들을 집무실에 불러 반협박에 가까운 태도로 부분적 국유화를 강행하였고(물론 은행의 국유화는 예전부터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권고해온 바이며 폴슨이 이번 조치는 심각한 뒷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브라운 총리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보로 금융위기의 충격을 최소화 하고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의 패자가 될 기획에 나서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 한국을 나누어주기 위해 한국을 팔고 있는 2MB 정부에게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시장의 논리를 내세우지만 진정한 시장에서의 효율성에 대한 고찰 및 사회 전체의 유지에 대한 고려는 없는 이 정부가 가야 할 길은 세계경제가 걸어왔던 긴 어둠의 길로 보인다. 아, 여기서도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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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투덜2008/10/13 21:40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노변정담' 을 본따왔다는 '이명박 쇼' 가 오늘 방송되었다. 평소 라디오나 TV 등의 매스미디어를 접하지 않는지라 인터넷으로 전문(全文)을 보았는데, 아니나다를까 2MB는 루즈벨트가 아니라 히틀러에 가까웠다. 2MB 를 까는 데에 혈안이 되어서 살인마 히틀러에 빗대냐는 소리가 들려올 법도 하지만 사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독일 사민당(SPD) 소속의 경제학자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제안한 내용이였다. 아마 히틀러가 2차 대전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독일의 루즈벨트로 기억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으니 그리 발끈하지는 말자. 루즈벨트와 히틀러 모두 양국의 경제를 살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의 경제' 를 살렸냐는 것이다.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쟁포로들과 유대인을 동원한 나치스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비정규직을 확대해서 젊은이들을 더욱 경쟁의 늪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2MB 정권, '수정의 밤' 과 '장검의 밤' 의 물리적 테러로 반대파를 숙청한 히틀러와 물대포와 강압수사로 촛불시민을 청소하는 2MB 정권은 행동양식에서 닮은 구석이 많다.
즉, 편협하고 무식하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적과 아군을 가르고 낙인을 찍고 국가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영락없이 히틀러와 닮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사는 과거와 명랑하게 결별하기 위해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히틀러와 2MB, 괴벨스와 최시중, 레니 리펜슈탈과 유인촌은 급수차이가 좀 많이 난다.

 다시 '이명박 쇼' 이야기로 돌아가자. IT 시대에 라디오를 통해서 연설을 하겠다는 것부터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거니와(이것도 단순히 인터넷으로 뜬 참여정부에 대한 반발일까? 아니면 국정연설과 '친한친구' 를 헷갈렸거나), 연설의 내용 역시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보다 나을게 하등 없다. 아마 2MB 의 말라 비틀어진 감수성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2MB 아버지의 걱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회사의 존립이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확충이다. 당시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회사가 망했더라도 소년 이명박과 이상득이 오늘날과 같은 비극의 인격체로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경제성장을 외치다가(난 아직도 작년 대선때 한나라당 공약자료집의 첫면을 기억한다. 노무현 정부를 자그마치 '성장률이 낮다' 고 비난했었다) 해외의 0%대 성장률을 들먹이며 국민들에게 희생을 주문하는 뻔뻔함은 이제 애교로 보인다.

 2MB가 하루이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하지 않은채 아까운 전파까지 낭비해가며  일장훈시만을 늘어놓는 모습은 매우 괘씸하다. 거시경제 지표만 살려주면 모두가 아무말 없이 조용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노무현 정권의 거시경제 지표는 현재보다 훨씬 나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시민들은 변화의 기회가 왔기 때문에 경제라는 이슈에 집중적으로 반응했을 뿐이지-전문용어로는 '선결과제' 라고 하던가- 일상에서의 시민들은 밥만 먹여주면 충성을 바치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성실한 시민들을 떡고물만 던져주면 꼬리를 흔드는 자신의 측근들과 같이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지난 대선 당시 2MB은 적극적 지지가 아닌, 반사이익에 의해 당선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MB 는 체감 경제를 살려달라고 에이전트로 뽑아놓은 것이지 우리의 미래를 맡길 대장놀이를 하라고 뽑아준 것이 아니다.

 청와대는 오늘의 쇼에 대해 '아날로그의 화법으로 IT 시대의 감성을 어루만졌다' 는 평을 했단다. 차라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를 보고 히틀러를 숭배하게 되었다고 하는게 더 그럴싸해 보인다.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현지시찰을 나서자 모두 수령님의 배려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라는 북조선제 프로파간다와 다를게 뭔가? 하여간 윗동네나 이동네나 합리적 이성이란 게 결여된 인간들이라 그런지 감성을 어지간히 좋아한다. 미적 감수성이 심각할 정도로 빈곤해서 문제지만. 형식과 내용이 모두 결여된 감성은 그냥 본능이다. 2MB 정부에는 마사지걸을 고르는 법과 성매매 업소의 운영에 해박하신, 본능에 충실한 분들이 많아서 그러려니 해야 하나? 

 안그래도 경제위기 때문에 가뜩이나 삶들이 팍팍한데 논리도 없고 재미는 더더욱 없는 연설을 할 작정이라면 차라리 2MB 본인이 몬도가네 쇼를 하는 것을 추천한다. 덜떨어진 극우 떨거지들이 좋아하는 레이건도 영화배우였는데(참고로, 아직도 신자유주의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멍청한 뉴라이트들의 '수괴' 인 네오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얼마전 레이거노믹스의 부적절성을 시인하였다) 2MB도 쇼를 하려면 제대로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최소한 나는 2MB를 좀 더 좋게 봐줄 의향이 있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경제2008/10/10 00:13

 프랑스 혁명의 전야,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치는 파리 시민의 앞에 나선 마리 앙투아네트는 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련하긴, 빵이 없으면 봉봉(과자의 일종)을 먹으면 되지" 아마 리만 브라더스로 통칭되는 2MB 와 강만수 일당도 같은 케이스로 기록될 것 같다. "외환위기라니?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달러를 모으면 되지"

"장롱 속 달러 내놓는 게 애국심 발휘하는 길" 
  김영선·박희태 등 '달러 모으기 운동' 공식화 
 
 
  한나라당이 '달러 모으기 운동'을 공식화했다. 국회 정무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은 9일 보도자료를 통해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을 완화하고 시장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적인 '외화통장 만들기 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지난 7일 당 국감대책회의에서 이 말을 꺼낸 바 있는 김 의원은 '자발적 국민 캠페인'이 돼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해 지속적, 안정적으로 외환을 조달하는 게 절실한 상황"이라며 "이번 캠페인이 은행의 유동성 확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도 △캠페인 기간 금리와 환율 우대 △외화 현금 취급 수수료 감면 등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 정부에도 세제 지원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박희태 대표도 이날 오전 <연합뉴스>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한 달러 사재기를 안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금고와 장롱에 있는 달러를 내놓는 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국민적 애국심을 발휘하는 길"이라고 거들었다.
 
  그는 "은행에 달러 예금을 많이 해 은행의 달러 보유고가 올라가면 대외 신용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을 한 것이 IMF 체제 극복의 심리적인 원동력이 됐었다"며 "달러를 은행에 예치하도록 운동을 하기보다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호소하는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덧붙였다.
 
  김영선 의원은 "이번의 '외화통장 만들기 운동'과 97년 외환위기 당시의 금 모으기 운동의 다른 점은 그때는 이미 최악의 위기가 닥친 이후 국민들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지만 지금은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올해 8월까지 해외 여행객수는 887만명이며, 이들이 귀국할 때 각자 50달러 정도를 갖고 온다고 가정하면 캠페인을 통해 모을 수 있는 외화는 약 4.4억 달러로 추산된다"며 "10년 전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수집된 금을 팔아 번 외화는 약 20억 달러에 달했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발적 캠페인'임을 전제했지만 여권 고위관계자들이 팔을 걷고 나섬에 따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최대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은행은 김 위원장의 말이 떨어진 다음 날인 지난 8일부터 외화 예치 고객에게 수수료 면제 등의 혜택을 부여하는 '외화 모으기'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업은행 측은 "자체적으로 결정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이날 자료에 기업은행의 외화모으기 캠페인 내용을 소상히 소개하기도 했다.   
 
  윤태곤/기자


 한나라당 일당의 머릿속에서는 해외여행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소풍인 모양이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이 저런 식의 캠페인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눈에는 얼마나 애처롭게 비칠지는 생각을 못해본것 같다. 서구 투자자들의 눈에는 국가주의적 동원으로 보일게 뻔한 캠페인을 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런 전체주의적 수단을 써야 할 정도로 외화 보유고가 부족해요" 라는 것을 광고하는 것 아닌가.

 현재 한국의 경제위기는 절대적인 외환보유고의 문제가 아닌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IMF 의 주범인 강만수 장관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불신과 2MB 정부의 역량에 대한 의문이 경제위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사회학과의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tter)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신뢰의 문제는 외환보유고와 같은 수치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구조 및 관계의 문제이다.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저하의 주범인 강만수 장관은 놓아둔 채(내년 내각개편때 강만수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이렇다면 2MB는 정말 악질인 셈이다. 당장 서민의 고통은 무시한채 자신의 탈출구만 확보해놓는 꼴이 아닌가) 저런 웃기지도 않는 텔레토비 동산식 해법을 제시하면서 내년 2월 자본통합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세계의 금융허브로 발돋움할 꿈을 꾸고 있다니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한때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할 꿈에 부풀었던 한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도미노에서 그나마 비켜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에 금융인재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증권가의 금융천재들이 한국에서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을 포함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판매하였다면 지금 사태는 환율과 코스피 지수가 만나는 천지창조를 넘어 땅과 하늘이 뒤바뀌는 노아의 홍수쯤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 광기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에서 주택이 중심이 되는 파생상품이 런칭된다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MB 정부는 통계까지 조작해가며(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바에 의하면, 종부세 대상자 중 34.75%에 달하는 사람이 연소득 4000만원 이하라는 강만수 장관과 통계를 제공하였다는 국세청 둘 중 한 곳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있다) 종합부동산세를 완화하여 부동산 경기를 끝없이 이어가려고 하며 자본통합법 역시 열거형이 아닌, 일단 금융상품을 포괄적으로 런칭한 후 부적절해 보이는 것을 정부가 솎아내는 포괄형을 채택하여-참고로 월가의 파생상품들은 설계자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구조와 리스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파생상품의 런칭을 쉽게 만들어주려고 한다. 우리의 리만 브라더스는 알아야 한다. 때로는 모르는게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연기금까지 투입하여 주가를 방어한다고 하는데, 이쯤되면 입에서 할렐루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낳은 금융 자본주의는 1970년대 미국의 연기금 투입으로부터 기원한다. 노동자 계급의 연금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정책이 역설적으로 연금의 안전성을 위한 단기이익 추구를 일반화 하면서 계급지배를 강화하게 된 것은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연기금을 운영하는 금융자본의 단기이익 추구에 휘둘리는 산업자본들은 생산시설에 투자를 하여 신기술을 개발하는 혁신보다는 리스크가 없는 비정규직화를 더욱 가속화하여 인건비의 절감을 추구한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연장하여야 하며 그것이 '나쁜 일자리' 가 아니라는, 젊은이들을 정말 88만원 세대로 만들 야망에 불타고 있는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인식수준을 보면 연기금의 투입과 2MB 정부의 노동정책이 결합되어 만들어낼 미래는 그나마 제 3섹터(시민사회)가 최소한의 복지를 담당하는 미국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미국의 하원은 국가가 금융시장을 엄격한 법적 기준에 의해 통제하는 스웨덴 식 모델을 검토하고 있건만 한국의 정부는 아직도 레이건 시대 꿈나라 속을 헤매고 있다. 투자은행(Investment Bank) 모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투명성과 정부의 준법의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2MB 정부는 어느것과도 거리가 멀어보인다. 도덕성과 신뢰가 결여된 금융산업의 종말은 현재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금융 자본주의의 귀결이 계급지배의 강화라고는 하지만 2MB 정부 하에서는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 같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하겠다는 정부는 대기업에게 달러를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건 이념적 시장주의자도 아니고 단순히 소규모 강부자 집단의 특수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다. 현재의 최첨단 금융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장치는 자산을 대차대조표에서 분리하여 유동성을 극대화 시켜주는 자산의 증권화(asset securitization)이다. 자본통합법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힐 2MB 정부는 한국의 부동산, 운하 등 모든 것을 증권화 하여 자신의 부하들과 강부자들이 독점하도록 만들어 줄 것 같다. 이미 사회기반시설(Infra structure)에 대한 투자를 주업으로 하는 투기자본 맥쿼리 증권의 인천공항 인수 가능성 등 조짐은 충분히 보이고 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에서 국가에 대해 부르주아들의 일상사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라고 하였지만 2MB 정부는 강부자들의 이자수익을 보존하기 위한 헤지펀드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의 한 구절이다.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인 은인으로 비추어지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는 다른 어느 계급에게도 시혜를 베풀 수 없다. 프롱드 난 당시 기즈 공작이 자신의 소유지 전부를 자기 부하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나누어 주어 자기에게 채무를 지게 함으로써 프랑스에서 가장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듯이 보나파르트도 프랑스의 모든 재산, 모든 노동을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채무로 변화시킴으로써 프랑스에서 가장 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게 프랑스를 선물할 수 있기 위하여, 아니 프랑스 돈으로 다시 프랑스를 사들이기 위하여 프랑스 전체를 훔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2월 10일회의 두목으로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국가 기관, 원로원, 국가회의, 입법부, 레죵 도뇌르 훈장, 병사들의 상패, 세탁장, 국영공장, 철도, 병사가 없는 국민 방위권 참모부, 오를레앙가의 몰수 재산 등 이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으로 된다. 또 군대와 정부 기관의 모든 지위는 매매 수단이 된다. 그러나 프랑스를 프랑스에게 주기 위하여 취해진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매매가 행해지는 사이에 12월 10일회의 두목과 부하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몫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8 17:22

 그저께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가더니 어제는 간첩을 잡았다고 난리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10년 만에 간첩이 잡혔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축을 하는 분위기이다. 미안하지만 '좌파정부' 동안 간첩을 안잡은게 아니다. 기초적인 자료는 찾아보고 자축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번 정권 마칠때까지 '좌파정부' 들 보다 간첩을 많이 잡나 지켜보겠다.

 확실히 이 정권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세철 교수의 구속과 여간첩 사건은 분명히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인데(우연의 일치라기엔 발표 시점이 참 절묘하다), 아직도 간첩 타령을 하면 국민들이 색깔론에 놀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릇 간첩사건은 조용조용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첩사건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안보관을 고취' 시키는 것 외에 다른 효과가 있는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는 군의 명예 및 신뢰도와 직결된 문제인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도록 방치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만약 간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이제야 급하게 잡아들이고 국민들의 안보관이 진심으로 걱정되어 발표를 한 것이라면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김정일도 암살하지 못하고 간첩도 제대로 못잡는 한심한 정보기관에게 세금을 낭비하기가 아까울 지경이지만 이미 국정원은 그동안 조용히, 그리고 착실하게 간첩들을 잡아왔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갑자기 간첩을 잡았다고, 마치 지난 10년간 최초로 간첩을 잡은마냥 떠벌리는 것은(물론 기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기삿감이 될 만한 소재이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도대체 왜 그 많고 많은 주사파들은 놔두고 급진 PD인 오세철 교수를 잡아 가두었냐는 점이다. 아마 주사파는 쓸어도 별로 소득이 될게 없기 때문일까? 급진 PD에 용공색깔을 칠하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큰 수확이긴 하다. 노동운동을 확실히 쓸어버릴 빌미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2MB는 노사문제에 대해 '법대로' 대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학계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오세철 교수의 집안이 그렇게 짱짱하다고 한다. 사실 오세철 교수 본인의 경력만 보더라도 2MB 정부의 왠만한 장관들보다 훨씬 화려하다. 그만큼 2MB 로서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넣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큰 행위인데 이러한 짓을 감행했다는 것은 리스크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리스크를 능가할 정도의 수확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소리이다.

 만약 2MB가 생각하는 것이 후자라면, 그리고 이번 간첩 사건과 연계가 되어 있다면 정말 무서운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p.s. 그나저나 오늘 오랜만에 학교에 가봤는데 연세대 총학 이것들은 독도 문제 관련 대자보(총학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규탄시위 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를 아직도 붙여놓고 있다. 하긴 이 뇌용량 2MB 짜리들에게 오세철 교수 구속 규탄성명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과연 여기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지 지켜보겠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1 11:05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은 1871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패배 이후 프랑스의 철광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역사 역시 이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17 13:16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한반도 대운하 신문' 이라는 괴신문을 보게 되었다. 저 악명높은 프리존 뉴스나 뉴라이트 청년 웹진 바이트 등 온갖 저급 흑색언론(검은 셔츠단을 상기하자)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이번 것은 강도가 좀 더 강했다. '한반도 대운하 신문' 이라니!

-신문 홈페이지는 여기-
http://www.kgwoonha.com/

 특정 토목 사업을-추진여부도 확정되지 않은- 제호로 내걸고 그것만을 보도내용으로 삼는 신문이 유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아우토반 차이퉁', '후버 데일리 트리뷴' 이라고 하니 조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신문의 창간기사를 보니 한반도대운하 방송국도 운영한다고 한다. 물론 신문과 방송 둘 다 온라인 상에서만 활동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신문과 방송을 굳이 찾아서 보는 사람이 있을지 매우 의문스럽다. 차라리 변희재의 빅뉴스를 보겠다.

 여하튼 이런 괴상한 신문을 도대체 누가 창간하였나 궁금해서 스크롤을 쭉 내려보았다. 웹페이지에 명시된 바로는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와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이 주축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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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한반도대운하재단' 으로 검색을 해보니 버젓한 홈페이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빈곤한 각종 시민단체들도 홈페이지 혹은 카페를 운영하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던 차에 취업사이트에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검색어가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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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치 공기업이다. 궁금해서 검색을 더 해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정보를 보았다. 지난 4월 4일 한반도대운하 재단은 국토해양부 산하로 편제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대운하 국민운동이라는 관제운동을 펼쳐오던 김주성이라는 사람(위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대운하 신문의 발행인이다)이 이 재단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http://www.lifebokji.com/news/article.html?no=376)
 
 2MB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며 민영화에 신들린듯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우량 흑자기업인 인천공항마저 민영화를 한다고 하여 민영화의 기준에 대한 의문마저 일게 하였는데, 이제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국고는 한정되어 있기에(게다가 대책없는 감세로 인한 세수감소는 치명적이다)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선별적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2MB는 경제논리 대신 진영논리로 공기업 및 정부를 운영하려는 모양이다. 인천공항 대신 한반도대운하 재단이라니, 항공기에서 바지선으로의 퇴보이다.

 한국에서 토목공사와 관련된 이익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섭다. 이들에게 전체 사회의 복리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2MB는 한반도대운하라는 거창한 '떡밥' 을 던짐으로서 떡밥을 둘러싼 파장만으로도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생겨나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대운하 관통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업의 성황과 그에 이어 대운하 사업 홍보팀까지 모든 것은 돈으로 움직인다.

 관제운동이나 벌이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게 떡고물을 쥐어주고 괴벨스의 입으로 활용하는 것이 2MB가 말하는 작은 정부라면, 이 정부는 굳이 2MB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작은 정부가 될 것 같다. 도대체 이런 정부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저절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 신문과 재단은 만약 한반도대운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거나 완공된다면 무슨 일을 할까? 아마 전자의 경우에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일으키며 계속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며 연명을 할 것 같다(종말예언이 어긋난 교주의 운명이랄까). 그런데 대운하 완공후의 행보는 쉽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 아마 대운하에 띄운 12층 규모의 유람선에서 2MB를 모시고 풍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Posted by 데학생
시사IN/국제 in2008/08/05 21:20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상징적인 계기들로 작용할 것 같다. 이미 '세계의 굴뚝' 으로서 세계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확립한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단순한 경제 강국을 넘어선,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 조짐은 이미 다방면에서 나타다고 있다.

 물론 중국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비하면 초라한, 절반의 성공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홉스봄의 신간 <폭력의 시대> 에서 지적하다시피, 미국의 헤게모니는 그것이 소비에트에 비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 다른 강대국들의 양해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구미의 선진국들은 이미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에 대해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쪽의 악덕을 더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유럽연합은 푸틴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서 중국을 한시적으로 어느정도의 패권국가로 인정해줄 것이다. 그리고 중국 패권의 한계는 거기까지이다. 세력균형을 맞추기 위한 물질적 추 이상을 넘어선, 아편전쟁 이전의 정신적 종주국까지 자처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언감생심이다.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담론이 '역사의 종말' 까지 선언한 현재 세계에서 중화주의가 전 세계인들의 가치기준이 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이번주 시사 IN 에서 서술하고 있는 중국의 올림픽 준비 내용을 보고 있자면 중국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미국에 맞서 중화블록을 건설하는 헤게모니 투쟁보다는 자신들의 중화를 정복하였던 서구적 근대의 '힘' 만을 추구하기로 한 것 같다. 인권문제를 이유로 스필버그가 사퇴한 후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담당한 장예모가 '황후화' 에서 보여주었던 것은 중화의 인문이 아닌, 서구의 시선으로 본 봉건적 동양 판타지의 스펙터클 뿐이었다.  이것은 상징적이다.

 장예모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및 현대 중국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구화된 근대 상하이라는 대체적 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최소한 엄격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서구적인 것을 현재 속에서 드러내놓고 욕망할 수 없었으니-는 이제 국가가 주도하는 한편의 거대한 연극 속에서 그 가면을 벗는다. 서구화는 둘째 치더라도, 스터디움 건축을 위해 아무런 보상 없이 주민들을 철거시키는 그 무지막지함 속에 노골적인 힘에 대한 갈망이라는 중국 패권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평소 함축된 고사성어로 외교 정책을 암시하던 중화적 인문의 세련된과 섬세함은 아편전쟁의 설욕을 향한 세력 과시의 일념에 압살되고 말았다. 유럽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거대한 스케일의 건축물과 서구의 예술가들이 만든 대형 전시물 속에서는 '세계의 굴뚝' 만이 보일뿐 동아시아의 문화 공장을 담당했던 깊은 '중화' 는 찾아볼 수 가 없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세계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포섭할 수는 없다. 강대국이 되는 것과 선진국이 되는 것 사이에는 황하의 폭 만큼이나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문제는 국가의 잘못된 방향설정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중국의 지식인과 엘리트들 역시 강대국을 향한 정부의 국가주의 프로젝트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목록은 <쿵푸팬더> 의 눈색깔을 트집잡아 드림웍스에게 소송을 건 '예술가' 부터 중화제국을 찬양하는 '지식인' 까지 참 다양하다. 아마도 이들의 버라이어티 쇼는 아편전쟁 이후 서구에 굴복한 중화제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원하는 것은 '강한' 중국이지 '깊은' 중화 문화는 아니다. 후자는 전자를 상상하고 과시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중국이 알리앙스 프랑세즈와 괴테 문화원에 맞서 공자를 내세우는 것은 유교에 대한 경의와 자부심보다는, '세계적인 것' 에 대한 집착이라는 면이 더 클 것이다. 공자는 우연히 그 기준에 부합했을 뿐이다. 성화봉송 당시 티벳 독립 반대를 외치며 발광하던 중국 유학생들의 모습은 유교적 예(禮)와는 거리가 먼, 벌거벗은 중국 패권의 본 모습이다.

 동북공정과 백두산 잠식을 일삼는 중국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동북아시아에 일본과 러시아라는 또 다른 강대국들이 있고 미국이라는 균형추가 존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만행들이 동아시아에서도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누가 아는가? 중국과 미국이 21세기 버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혹시라도 모른다면 꼭 찾아보기 바란다. 이것이 제국의 실체다)이라도 맺을 수 있을지.

 중국은 위험하다. 미국과 같은 가식조차 존재하지 않는 노골적인 권력 그 자체이다(물론 이것이 네오콘의 중국 위협론과 궤를 같이 하여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중국과 외교적으로 많은 관련이 있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야욕에 대한 대응을 분명히 마련하여야 한다. 한국 역시 북한을 내부식민지로 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버려야 함은 당연지사이지만(금강산 관광을 '시혜' 로 보는 2MB 의 오만함을 상기하자).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세계패권을 향한 상징으로 이용하려는 중국과 국내의 여론을 돌리기 위한 용도로 이용하려는 2MB의, 서로 의식하지 못하는 밀월 아닌 밀월은 우려스럽다. 인문을 던져버린 벌거벗은 국가주의자들의 무의식적 상동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는 날부터, 우석훈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우려하였던, 문화가 거세된 노골적인 힘들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한국을 인문국가로 만들 수는 있으니, 패권적 야욕에 대한 지혜롭고 세련된 대응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무더운 여름에 피서삼아 베이징 올림픽을 즐기는 것은 좋다. 올림픽을 본다는 것 자체가 국가주의적 술책에 놀아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2MB가 원하는 불도저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문과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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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