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18 연고전 그리고 '스포츠 연세' (4)
  2. 2008/08/21 올림픽이라는 유령
투덜투덜2009/04/18 21:05

 지난 2008년 2학기, 개강 첫 주의 화두는 단연 연고전이었다. <연세춘추>(이하 ‘춘추’) 역시 이에 발맞추어 9월 1일 발간된 1593호에서 연고전 특집을 보도기획으로 다루었다. 종목별로 경기방식, 주목할 선수, 전력분석, 전문가분석과 같은 4개의 세분화된 코너를 만들어  자세한 정보를 소개한 춘추는 이 외에도 연고전에 대한 많은 기사를 1594호 까지 2주 분량에 걸쳐 수록하였다. 연고전은 두 거대사학이 공식적으로 개최하는 행사이며, 응원단에서 개별 학우들까지 수많은 교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이기에 이에 대해 마땅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교내 언론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연고전을 보도하는 춘추의 태도는 합당한 정도의 관심을 표명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과열에 가까워 보인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종목별 심화분석은 정론지를 자처하는 교내언론이 특별기사로 내보낼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다. 팀의 전력 분석과 선수 개개인에 대한 분석, 전문가 평론까지 곁들인 보도기획은 평소 교내의 여러 목소리들에 관심을 보이고 공론장을 만들어주었던 춘추의 평소 행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오세철 교수 구속 등의 사건들 역시 다루고 있지만 ‘보도기획’ 이라는 이름하에 연고전이라는 하나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포츠로서의 연고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스포츠 연세’ 가 할 일이지 춘추가 할 일이 아니다.

 

 또한 1593 호의 기사 “연·고전에서의 진정한 승리” 는 연고전에 대한 과열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넘어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는 섬뜩함까지 풍긴다. 다음은 이 기사의 몇 구절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스포츠를 통하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일체감을 부여하고, 승리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한 것처럼, 연·고전은 연세의 이름으로 재학생, 동문, 교직원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축제의 장이다.”

 

“올해에도 연세의 지성들이 단단한 결집력으로 독수리처럼 지축을 박차고 높게 비상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일체감’ ‘자부심’ ‘긍지’ ‘모두가 하나’ ‘단단한 결집력’ 등의 어휘가 난무하는 기사는 스포츠가 시민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는 엘리트 스포츠가 아닌 대학생들의 건전한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한 주문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문제의식은 결코 스포츠의 사회적 맥락까지는 이르지 못하며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역시 기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문제는 ‘미완의 연고전’ 이 아니라 연고전 그 자체이다.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제국주의의 국민동원 프로그램과 그 연원이 맞닿아 있다. 물론 일반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생활 스포츠는 그 자체로 바람직한 기획이지만 공동체 통합의 목소리와 맞물리는 순간 섬뜩한 쇳소리를 낸다.

 

 기사의 후반부에서 바람직한 예로 제시하는 서구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격화되던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서구의 체육교육이 모델로 삼는 지덕체(智德體)가 합일된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기사에서 바람직한 통합의 기제로 간주하는 근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강한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에서 비롯된 행사에 불과하다. 통합을 강조하는 기사 첫머리에서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을 찬양하는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 를 촬영하였던 레니 리펜슈탈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1594호의 기사 “응원단,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는 언론의 사회적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자의 자질 향상이 필수적이라는 고전적 진리를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연세대의 상징인 파란색이 일본 응원단 ‘울트라 닛폰’ 의 응원가를 차용한 연세대의 응원가 ‘싸.이.고’  와 얽혀 일본을 연상케 한다는 기자의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빨간색이 위쪽, 파란색이 아래쪽에 있는 태극기는 한일전이 있을 때마다 일본을 발밑에 두자는 제국주의적 사상을 연상케 하는 문제 있는 국기인가? 차라리 기자가 문제 삼은 응원가 ‘싸.이.고’ 의 제목이 정한론(征韓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침공 시도까지 한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이름과 같다고 기사를 쓰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였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통합에 대해 수많은 뛰어난 연구결과를 남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그의 마지막 저작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에서 원시상태의 인류가 집단적으로 종교의례를 행하며 느끼는 집단적 열광의 경험이 사회를 하나로 묶게 된다고 보았다. “공통적인 관념을 공통적인 의례로 함께 옮긴다는 사실에 의해 결합되어진 사회“ 와 ”사회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이라는 뒤르켐의 언명은 집단적 체험이 집단의 결속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행하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그리고 뒤르켐에 따르면 종교적 체험이 기반이 된, 공통의 신념으로 묶인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에 기초한 사회는 개인의 의식이 집단의 의식에 귀속된,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이다. 뒤르켐이 말하는 집단적 열광의 경험과 연고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연고전이 학업에 지친 학우들에게 신성하고 흥분되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수행하는 긍정적 기능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혈적 공동체로의 통합기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폭력적 측면 역시 바라보아야 한다. 연고전이 자유로운 지성인들의 자유로운 결사를 촉진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연고전은 지성의 도피처에 가깝다. 저 위대한 트리어(Trier)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고전에 대한 열광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도피이다. 연고전은 곤궁한 신입생의 한숨이며, 무정한 대학생활의 감정이고, 또 영혼 없는 상아탑의 정신이다. 연고전은 학우들의 아편이다. 이것은 비단 연고전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는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되는 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대개의 경우 이질적 주체들을 타자화(他者化) 시키며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직시할 수 없게 만들기 마련이다.

 

 연고전에 대한 필자의 부정적 의견은 차치하더라도,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정론지는 모름지기 사회현상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공론들이 형성되는 것을 도와야지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려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성인들이 모여 있다는 상아탑의 언론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탈리아의 세계적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지식인은 단춧구멍에 꽂는 장미꽃이 아니라, 대중이 깨닫지 못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문제들을 들추어내는 것이 그 본연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세대의 학우들은 ‘연세인’ 이기 이전에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지닌 ‘대학생’ 이다. 역시 언론의 임무는 대중의 구미를 잘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편한 진실’ 을 상기시켜 줌으로서 독자들에게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을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연고전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소개하고, 연고전 시즌에 이루어진 오세철 교수의 구속에 대한 취재도 비교적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한 춘추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다소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교내의 유일한 학보로서 춘추의 위치와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비판은 필수적이다.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어 졌을 때 시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에 의도적으로 무게를 싣어주어야 한다. 이는 춘추의 보도방식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연고전이 연세대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성찰되어야 할 하나의 ‘현상’ 이라면, 그리고 허구적 통합의 열망이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수많은 열광의 함성에 묵살되지 않도록 무게를 싣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춘추가 적극적으로 연고전 반대 운동에 나서라는 주문이 아니라 목소리의 크기들을 조절해달라는 주문이다. 1594호의 “안티 무관심” 이라는 칼럼에서 올바르게 제기해준 문제의식을 춘추의 편집의도에도 반영하여야 춘추가 진정으로 지성인들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중앙언론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연세 언론비평> 에 게재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1 11:05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은 1871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패배 이후 프랑스의 철광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역사 역시 이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