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사회학2009/06/24 22:59

요약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반영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정치적 반영, 과도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 정책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같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집권 과정부터 집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정당정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퇴행시키며 스펙터클에 의한 동원참여를 이끌어 내는,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에 의존하였다.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욕망에 충실한 한국의 중간계급이며 이들은 노사모  · 촛불과 같은 동원참여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정치적 정서를 표출해왔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에서 나타나는 정서 역시 노무현의 실제 정책과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정치적 평가보다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동일시 대상의 죽음과 영결식의 패전트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참여는 반정치적 정서를 재생산하며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독으로 작용한다.


 이 글의 목적은 노무현 추모 열기라는 현상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나 단편적 분석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라는 통시적이고 거시적인 과정 내에 현상을 위치시키고 바라보는 데에 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이명박과 같은 개인의 가치관이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당정치 구조의 부실과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다. 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협애한 이념적 대립 축을 중심으로 갈등하는 정당체제는 인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며, 다원주의 없는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최장집, 2005).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어가던 시점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헤게모니와의 대면과 타협,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의 덫에 갇혔으며 사회적 갈등의 발현을 억압하는 통합이데올로기, 과도한 도덕주의, 민주적 가치와 위배되는 전문가주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도한 도덕주의를 내세운 정당개혁과 리더십의 문제는 오히려 정당과 시민의 연계 고리를 파괴하였으며, 헤게모니와의 타협과 통합이데올로기에의 포섭은 정당의 갈등축을 흐리게 하여 전반적인 정당구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최장집, 2006: 75-91).

 

이러한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선택하였던 방법은 정당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 즉 스펙터클을 통한 대중의 동원참여(박동진 외, 2006: 64)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웠던 정치적 스펙터클의 전형은 지역주의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경제적 갈등 축을 직접적 대변하고 돌파하기 보다는 초지일관 ‘지역주의 타파’를 제일의 정치적 동원기제로 활용하였고, 더 나아가 지역주의 문제를 참여정부의 정치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강병익, 2007a: 88). 하지만 지역주의 문제는 한국정치의 근본모순을 구성하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갈등축의 억압에서 기인한 종속변수일뿐더러, 이에 대처하는 노무현 정부의 방안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박상훈, 2005). 더욱이, 노무현 정부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제안한 정책들은 지역주의의 해소보다는 대부분 당시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각주:1]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는 진영이 명확하고 도덕적 열정을 추동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이끌어냄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열정적 동원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스펙터클의 구체적 결과가 체감되지 않을 시에는 오히려 참여자들에게 피로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줌으로써 냉소주의를 심화 · 확산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의 축을 재정의 하는 데에 대규모의 정치자원을 투입함으로써 사회의 근본모순을 규정하는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억압하고, 스펙터클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샤츠슈나이더, 2008). 이는 도덕적 열정에 의한 스펙터클에 대한 중간계급[각주:2]의 매혹,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대변하지 못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혐오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반하는 반(反)정치주의로 귀결된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는 지역주의나 탄핵 문제와 같은, 진영이 전국적 규모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하고 이에 대한 도덕적 열정을 동원하는 방식의 정치를 시행하였지만, 담론과 실제 정책의 내용은 괴리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에 의한 정치는 정치적 스펙터클의 강력한 동원자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반정치적인 경향으로 귀결되어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가 연출한 정치적 스펙터클을 도덕적 스펙터클로 받아들인 중간계급이다. 중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의 확대와 중간계급 의식을 반영하는, 철학과 가치관이 결여된 절충적 · 덕담 수준의 지속적인 ‘욕망의 정치’ 의 확대는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귀결을 방증하고 있다(강병익, 2007b).

 

촛불을 거쳐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드러난 일련의 흐름은 위와 같은 계급 편향적이면서도 보편담론을 표방하는 중간계급의 허위의식이자,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와 심정윤리만을 강조하는 반지성주의 및 반정치주의의 포괄적인 총체이다. 촛불은 환등상(phantasmagoria)으로 어른거리다 사라진 근대성의 그림자이자 거대한 스펙터클로서 도시의 중간계급을 유혹하는 욕망의 기제였다(이택광, 2009). 또한 유사과학과 괴담에 의해 추동되고 이론의 빈곤을 배태하고 있는 반정치주의와 탈정치화의 통로였다(백승욱, 2009). 촛불을 통해 나타난 흐름은 이른바 ‘촛불시민’ 이 다시 거리로 나온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노무현의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냉정한 이론적 고찰은 사라진 채 유시민 전 의원 류의 유사이론(유시민, 2005)에 의거하여 진중권 중앙대 교수,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와 같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규탄과 성토가 나타났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 라는 이름이 삼성경제연구소의 아이디어라는 점과 노무현과 이학수의 개인적 유착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고 있지 않다.[각주: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그가 생전에 동원하였던 지역주의, 개헌 등과 같은 스펙터클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얽힌 내러티브와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상징 및 이미지가 정치적 공간을 혁명적으로 재편한다. 이는 후보의 정강 대신 현직 의원의 기록에 투표하는 경향, 의사소통 기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미디어적 인물(media figure)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현상의 반영(마넹, 2004: 266-269)이다. 정당의 이합집산은 스펙터클이 될 수 없지만 정치인 개인의 죽음은 거대한 스펙터클이 된다. 이 시점에서 정치는 다시 스펙터클로 환원된다. 이명박 정부는 세심한 정책적 비판의 대상이 아닌, 선과 악의 결전이라는 스펙터클한 구도 속에서 타도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상정되며, 정치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영논리와 십자군적 열정에 의해 재배치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이러한 감정적 스펙터클이 물질적 패전트로 물화(Reification)됨으로써 스펙터클의 정점을 이루며, 그 동원효과를 극대화한다.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記意)를 학습시킨다. 하지만 권력의 기의는 패전트를 연출하는 현실권력의 의도대로 각인되지는 않으며, 대중이 패전트에서 경험하는 것은 현실권력의 ‘성격’ 이 아닌 권력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경험한 대중은 권력의 기표(記標)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죽은 노무현은 일본 근대 초입, 메이지 천황이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랬듯 영결식을 통해 순행(巡行)을 실천하였고 시민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시민들은 여기서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며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후지타니, 2004: 301-30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통상적 반응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분명 의사(擬似) 수호자주의이며 현실 정치의 원칙으로 삼기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달, 2006: 112-168, 301-30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이명박 전선’ 으로 결집된 정치권은 노무현 추모 열기를 정치적 자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노무현 추모 정국에 동참하는 대부분의 중간계급은 스펙터클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 이라는 통합 이데올로기에 의한 진영재편은 배제되고 억압된 계급에 대한 동정과 멸시의 자세로 표출되며 이는 실질적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현대정치의 특징 중 하나인 욕망에 의한 정치에 대한 급격한 반동은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과도한 도덕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며[각주:4],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욕구의 반지성주의적 표출은 정부의 대내 자율성을 저해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파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보비오, 2007: 126-132).

 

정리하자면, 현재의 노무현 추모 정국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평가나 정책적 고려가 결여된 채 이루어지고 있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자 반지성주의, 과도한 도덕주의, 의사 수호자주의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이명박의 좋은 아버지(buon padre)버전에 불과하다.[각주:5] 따라서 노무현에 대한 추모 열기는 결코 특별하고 위대한 도덕성의 표출이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의 연장선상에서 국면적으로 발현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갈등축을 폭력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사회의 진정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열정의 동원참여에 의한 최대강령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이성적 과정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기여를 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열망과 절망의 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더욱 깊게 재생산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파국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징후이다. 

 

참고문헌

 

강병익a,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의 리더십”,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창간호 pp.77-90

______b “철학도 실체도 없는 보수정치의 중도론”,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5 ․ 6월호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 2004

달, 로버트(Robert A. Dahl),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 지성사, 2006

마넹, 버나드(Bernard Manin),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박동진 외, 『인터넷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박상훈,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2일자

백승욱,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보비오, 노르베르토(Norberto Bobbio),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2007

샤츠슈나이더.E.E.(Elmer Eric Schattschneider), 『절반의 인민주권』, 후마니타스, 2008

시사IN, ‘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2007년 11호

유시민, ‘나는 더 중요한 정치인 되고싶지 않다’,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6일자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

______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______ “촛불의 매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______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연세대학교 시국토론회 발제문

  1.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이 도입하려고 하였던 전두환식 2인 중선거구제도는 지역주의 해결에 대한 노무현 정부 및 집권여당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중선거구제는 사실상 비례대표제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STV식(아일랜드에서 사용)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용하다 폐지한 SNTV식을 도입을 주장한 건데, SNTV식 중선거구제는 단순다수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보다도 못한 제도이다. 또한 비례대표제 역시 노무현의 주도가 아닌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스펙터클화하여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중선거구-이원행정부제 논의는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본문으로]
  2. 중간계급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이택광,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과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를 참조. [본문으로]
  3.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서다가 좌초한 노무현이라는 신화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삼성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집권기간 전반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며, 삼성 X 파일 사건에 대해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가운데 도청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 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행태로 일관하였다(‘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시사IN, 11호). [본문으로]
  4. 흥미로운 점은 중간계급의 도덕주의는 청교도적 금욕주의 보다는 ‘욕망의 평등’ 에 대한, 분배적 정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의 정치적 휩쓸림은 이명박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던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편입 욕망이 좌절되자 욕망의 평등이라는, 즉 각개약진이 실패하자 일종의 연대전술을 취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연대는 그들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부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로 귀결된다. [본문으로]
  5. 어청수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기용되었으며, ‘명박산성’ 은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회의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행 집시법 역시 노무현 정부의 유산이다. 또한 임채진 검찰총장 역시 노무현이 두둔한 ‘삼성 장학금’ 검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무현에 대해 신화가 만들어지고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것은 유사역사가 가지는 판타지에 대한 매혹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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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투덜2009/06/12 06:29
 최근 종강을 맞아 기말과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나절 과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고 시청으로 나갔다. 작년보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역시 분노의 에너지는 슬픔보다 강한 모양이다- 그래도 올해 들어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최대로 모인 것 같다. 경찰측 추산으로는 5만명, 주최측 추산으로는 15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얼추 10만명 내외로 모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작년 촛불정국 당시와 비교하였을 때, 무난하게 모인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6월 10일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는 참여주체들이기는 하다. 촛불 때와는 달리 범야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87년 이후 최대도전연합이 정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다.
 하지만 상기해야 할 점은 87년도의 최대도전연합 형성은 박종철의 사망 자체로 터진 것이 아니라, 사망경위에 대한 은폐기도에 대한 분노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이한열의 현장에서의 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세는 87년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당시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도전연합을 포섭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지배블록과는 달리 현재의 지배블록은 딱히 도전연합을 포섭할만한 동기가 없다. 지배블록 내부의 분화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친박계가 민주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또한 예상대로 청와대는 야권에 대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동강령 역시 수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중도하차하게 만들 뾰족한 수단과 명분이 모두 없다는 점-아쉽게도, 2MB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상당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들까지 대표하여야 하는 체제이다-에서는 정국을 타개할 방법이 더욱 묘연하다. 국회에서의 탄핵소추 발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게다가, 설사 친박계의 초강수로 탄핵소추가 발의된다 하더라도, 이는 사법의 정치화를 뒤집은 정치의 사법화로의 역편향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이 정부를 하차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찰스 틸리의 지적대로 동원에서 성공적인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특히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의 속성을 고려한다면(어제 광장에 모인 상당수는 정장을 빼입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이 2MB 를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만들어내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리가 만무하다.
 2MB 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끌어내릴 수 없다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앞으로의 3년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문화과학」과 「한겨레 21」에서 이야기하는, 2MB가 파시즘 X 로 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버' 임에 분명하지만, 3년간 고민하고 대비해야 할 것은 2MB 이후이다. 2MB 다음으로 올 것은 박근혜의 보나파르티즘인가, 유시민의 보수적 민주주의인가, 제 3의 인물의 파시즘 X인가. 2MB 정부의 헤게모니 상실과 비효율적인 무리한 통치행위, 그리고 거리의 반정치적 정치 사이에 부재하는 정치를 회복할 길은 아직 멀어보인다. 역시 우리가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한 안티테제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이다. 6월 항쟁 22주년을 맞아 우리는 '독재 세력' 이라는 손쉬운 적이 아닌, 복잡하고 뒤틀린 역사의 미로 속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복잡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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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의 변주곡2009/05/24 03:23

0.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는 과도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굳이 몇 줄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것이다. 내가 할 일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어떠한 감상을 배제한 채,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는 것이다. 파토스는 이미 넘칠대로 넘쳤다. 총체적 분석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개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1. 노무현 시대의 종언은 결국 노무현 시대보다 더욱 강렬한 반정치의 정치로 회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수단에 의한 갈등해결의 통로를 막아버린 이명박 정권이라는 환경과, 노무현 자신이 만들고 죽음으로서 완성시킨 반정치적 순수성에의 열망의 결합은 결국 거리의 정치라는 형식으로 귀결될 것이다.

 

2. 운동에 의한 정치의 문제점은 사안들을 위계화함으로써 포괄이슈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노무현에 의해 덮일 여러가지 사안들이 안타깝다. 가버린 사람도 안타깝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여러 미래들이 더 안타깝지 않을까.

 

3. 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과거의 일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기에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노무현의 유산을 계승하는 작업은 곧 실패한 노무현 시대에 대한 분석의 작업이지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속의 노무현의 영접이 아니다.

 

4. 노무현의 죽음이 동원하는 시민은 결국 중간계급의 촛불, 노무현의 촛불이다. 이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노무현의 목소리를 내면화 함으로써, 즉 노무현을 선택할 당시의 자신의 가치관을 영속화 함으로써 진화없는 동일한 과정의 반복을 연출한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분리는 09년 5월 23일 노무현 추모 집회와 민주노총 집회의 분리로 반복되며, 매개가 없는 양자의 단절은 또다시 도덕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중간계급의 자기만족적 정치, 계급적 증오에 의해 추동되는 노동계급의 파괴적 정치라는 반정치적 정치를 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5. 현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는 결국 살아있는 자들 스스로를 위한 추도이다. 이것은 자연인 노무현이라는 단일 인격체가 아닌, 정치인 노무현에게 투사된 자신들의 욕망과 열정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중간계급의 물화된 시대정신인 노무현이 사라짐으로써, 그것도 이명박정권의 검찰수사에 의해 사라짐으로써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은 노무현을 추모하는 형식을 통해 노무현에게 투사했던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기념하고 인정한다. 급진적으로 자신과 단절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는 중간계급에게 있어서 노무현 시대를 청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노무현에 의한 호명에 응하는 것이 훨씬 쉬운 선택이였을 것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정치2009/01/18 20:20

 현재 당의 대의원 선출 방식과 관련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과정에 대해 폭넓은 당원 전반의 참여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정종권 위원장님과 회사원님의 글들을 보았고 여러 당원 분들의 글을 보았는데, 추첨제라는 낯선 제도가 제안된 것과 일각에서 일인다표제를 주장하는 논거의 방식에 대해서는 다소 우려스러운 경향이 엿보여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우선 일인다표제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판단을 유보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말하겠습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투표보다 추첨을 더 '민주적' 인 것으로 간주하였지만 그것은 고대 아테네 시민사회가 고도로 동질적인 집단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추첨제와 일인다표제를 주장하는 분들의 취지는 결국 '평당원' 으로 대변되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방법들이 '평당원' 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입니다. 직업 등의 모든 요소가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추첨이라는 방식으로 다양한 당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의제화 시킬 가능성은 확률에 기대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당은 일종의 작은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일반의지' 를 직접 접촉하게 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평당원의 참여를 주장하시는 분들의 상당수는 평당원을 동일한 질을 지닌 '일반의지' 로 상정하고 평당원의 선출여부를 강조하시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에는 그 폭주를 막기 위해 직업 정치인으로 대변되는 매개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사회는 노련한 국가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추첨에 의한 대의원 선출은 그들의 대표성과 책임성 여부를 떠나 역설적으로 '평당원' 의 이익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큽니다.

 좋은 정치란 인민 스스로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죠), 인민들에게 좋은 대안을 제시하고 본질적인 균열들을 반영하여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단순히 '평당원' 이 대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원들이 어떻게 하면 평당원들의 다양한 관심사들을 포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통일된 정체성을 가진 조직이 아닌 다양한 집단을 포괄하고 있는 정당으로서는 각 집단들의 균열을 가장 적절하게 반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균열의 반영은 마냥 당사자들을 바로 정당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킨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요행에 기댄 목소리들을 바로 힘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들이 목소리들에 의해 통제받는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당 내부의 정파들끼리 민주적인 경쟁과 균열을 둘러싼 동원을 통해서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지 '추첨' 이라는 신의 주사위 굴리기로 소수자들을 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자가 중요시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균열축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반복되는 것은 당내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적인 이해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민주주의는 당위 이전에 현실이며, 따라서 기존의 신화적인 운동적 정치관에서 탈피하여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책임있는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실험' 혹은 '소수자' 등의 당위를 내세워 정치를 실험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이 엄숙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험과 상상력만을 중요시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의견이 어떻든 많은 당원들이 이번 문제에 대해 많은 목소리를 내며 문제의 본질을 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데학생
광대의 사회학2009/01/10 18:52

진보신당 학생모임 내부의 문제 때문에 쓴 글입니다만 논쟁을 정리하는 1부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1부 교통정리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1. 교통정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의 시발점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에 대한 권병덕 님의 비판입니다. 코스프레와 같은 집회, 장학기금 조성,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은 소위 '운동권' 의 이미지 개선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근거 부실을 이유로 반지성주의라는 지적을 하였고, 최광재 님은 이에 대해 '창조적 파괴' 를 내세우며 재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권병덕 님이 지적하시는 부분과 최광재 님의 반박은 서로 맞물리지 못하고 있기에 일단의 교통정리가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다시피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을 구체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지성주의로 규정 하였습니다. 금다니엘 님의 평소 언행을 모르는 저로서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이 불성실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적극적으로 이론과 성찰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현실정합성이 결여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지점이 있겠고 저러한 제안이 반지성주의로 발전할 만한 소지가 있지만 그러한 제안 자체를 반지성주의적-정책팀을 축소하자는 정도의 제안이라면 충분히 저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최광재 님은 권병덕 님의 반지성주의 규탄에 대해서 '창조적 파괴'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반박을 하였지만 이것이 과연 권병덕 님의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최광재 님의 반박에는 '창조적 파괴' 의 구체적 내용(최광재 님은 결과가 투입비용보다 크다면 창조적 파괴가 용인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대차대조표를 성실하게 작성하라는 권병덕 님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습니다)과 그것이 어떻게 지성보다 우월할 수 있는지, 혹은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 창초적 파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논증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권병덕 님의 비판의 핵심이였던 '지성' 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쟁점인 명동 당사 이전에 대해서는 최광재 님이 반박 지점을 제대로 짚어 주셨습니다. 양 측의 주장을 요약해보자면 권병덕 님은 부지비용 및 기자들의 접근성,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보량의 이점 때문에 당사 이전을 반대하며 최광재 님은 대중들과의 직접적 접촉 가능성 때문에 당사 이전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을 지켜보는 분들이 각자 주관에 따라 현실정합성을 따져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이 당사 이전의 찬성 논거로 내세우는 부분, 즉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관점의 기저에 깔려있는 정당관의 문제입니다.
 
2. 일반의지와 정당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개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회계약론>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민권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그것입니다. 루소는 사회를 개별의지와 집합의지, 일반의지의 세가지 층위로 구분합니다. 개별의지는 개인의 의사이며 집합의지는 이 개별의지들의 단순한 총합, 그리고 일반의지는 집합의지의 본질을 이루는,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단일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주권을 왕이라는 개인에게 집약시키는 보뎅 류의 왕권신수설의 사상적 얼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격적 주권론(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긍정적 술어가 아닌, 주권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지칭합니다)의 흔적이며, 사회의 단일한 이익과 의지가 존재한다는 일반의지의 개념은 자신들이 일반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단일정당이나 개인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정당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은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의 가장 중요한 이점으로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뽑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그 대중이 어떠한 대중이며 이들과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단 두 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두 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보정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최대한 자주 하는 것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지당한 말입니다. 문제는 소통의 방식입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의 상당수는 대중의 일반의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는 식의, 신과 인간 사이의 법열(法悅)을 방불케 하는 신학적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그 자체로서의(sui generus) 사회' 로 전치시키며 '사회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파 정당이 주장하는 허구적인 국민통합이 아닌,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체제를 전제로 행동하는 진보정당이 사회유기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단일한 질(質)로서의 대중을 가정하며(이는 파시즘의 주요 특징입니다) 그들의 단일한 일반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자세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 '서민' 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서민들의 단일한 이익이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 적대적인 계급의 투쟁의 역사라는 맑스의 도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현대사회의 특징은 기능과 이익의 분화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일반의지의 존재여부에 대한 증명이 선행되지 않은채 일반의지와 직접 접촉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것은 소모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질(質)로서의 서민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발상은 현실정치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하지만 인민에 의한 직접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슬로건에는 부합하는 일종의 레토릭 혹은 신화적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균열선을 따라 분열되어 있는 인민의 열정을 지배적인 모순을 축으로 규합하여 그것을 제도화된 형태로 정치영역에서 풀어내는 조직입니다. 이 과정 중 한가지만 결여되더라도 그것은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대중과의 직접적 소통을 강조하는 분들은 인민의 열정을 정제하고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것을 규합하여 정치외적인 혁명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뉘앙스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코뱅 독재부터 스탈린 독재까지 좌우를 망라한 전체주의 정권들의 공통점은 '인민의 일반의지' 와 '지도자' 혹은 '변혁' 의 직접적 대면을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정당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호자주의이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의 일반의지와 실제 일반의지(존재한다면)가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정당 모델은 크게 전문가 정당과 대중 정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이념형은 전자가 선거 전문가에 의한 '지지자' 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포괄정당이라면 후자는 뚜렷한 정강과 정책방향을 가지고 기층 당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정당입니다.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전문가 정당 모델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폭넓은 당원층을 기반으로 당원들간의 소통에 기반하여 당의 정책 수립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대중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전문가 정당은 본질적으로 득표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과 정당 자신이 변증법적 관계를 통하여 서로 바뀌어나가는 것이 힘들며 정치공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집권을 목표로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100% 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가 아닌, 이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모순을 균열축으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규합함으로써, 50%의 지지율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통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자면 정당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층위에서 활동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의 소통은 기층 당원이 담당할 일이지 당 사무실 이전 등을 통해 당 공식기관이 나설 일은 아닙니다. 당 공식기관이 할 일은 기층 당원들이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얻어온 정보들을 규합하여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정책을 만드는 '정치적인' 일입니다. 당원들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당의 위세를 위해서가 아닌, 일반 대중과 당 사이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며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소통의 방식은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해서는 일방적인 계몽 혹은 얼굴도장찍기 이상의 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당으로서는 피드백을 받을 방법이 부재합니다. 요컨대 '현재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는 자위 이상의 것이 나올 수 가 없습니다. 서로 층위가 다른 개별 대중과 정당 사이에 진솔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개별 대중이 아닌, 단일한 질로서의 대중의 일반의지를 당의 직접 접촉을 통해 읽어내겠다는 식의 발상의 무익함 역시 딱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반의지' 를 등에 업고 '헤게모니 투쟁' 과 '지적 압도' 없이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저는 저 두가지 방법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선거를 통하여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생디칼리즘 적인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의주의가 아닌 냉정한 계산에 의한 정치입니다.
 
3. 운동을 넘어 정치로
 
 현재 진보정당에 몸담고 계신 많은 분들이 운동단체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보수 양당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진보정당의 활동영역과 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이 상당부분 겹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가 굳이 분리되어 각자 존재하는 이유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열정을 여과없이 힘으로 전화(傳化)하여 정치외적인 압력을 통해 모순을 일거에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정당은 열정을 제도적으로 정제하여 정치영역 내에서의 경쟁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보다시피 양자의 작동 방식과 목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당을 통해 일거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급격한 변화에 맞서 대자적으로 조직된 관료층 및 기존 헤게모니의 저항에 부딪쳐 좌초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혁명과 같이 정치외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굳이 그 매개체로 정당을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정치를 통한 변화는 골치아프고 큰 효과도 없어 보이지만 가장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단지 급격한 변화 자체만을 원한다면 진보정당 활동이 아닌 아나키즘 혹은 볼셰비즘에 투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혹은 변동 자체에 의해 낙오되는 약자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정당은 가장 효과적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회운동은 그것에 투신할 수 있는 자원 혹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 사회에 인민대중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원한다면 그것은 인민의 일반의지를 읽어냈다는 독단을 가진 혁명투사가 주도하는 일방적 개혁이 아닌, 당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정책을 가다듬고 의회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의 의원들과 부단히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하여 정치과정에 뛰어든 이상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역시 지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직되어 있는 헤게모니에 비조직적인 대오로 뛰어드는 것은 어떠한 성과도 거두기가 힘듭니다. 요새들어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리더십은 좌우를 불문하고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10월 유신과 산업화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역시 김일성이 없었다면 주체사상은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북한 체제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권력과 정치에 대해 통찰력 있는 많은 연구를 수행한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지나친 관료화로 민주주의가 고사하는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희구했을 정도이니 정치에 있어서 리더십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필수적인 요소를 무조건 터부시하며 배척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기존의 의회 정당정치에 대해 '여의도 정치' 로 폄하하는 것은 2MB 대통령의 후보시절 발언에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과 신자유주의 노선의 기묘한 동거가 발생합니다. 진보적 학자였던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한 보수적 학자 뒤르켐의 사회에 대한 개념과 통하듯이, 그리고 맑시스트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에 대해 나치의 법학자 칼 슈미트가 찬사를 보냈듯이 상황의 지나친 단순화는 극과 극을 통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저는 단순히 극단적인 것은 지양하여야 한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극단이 현실에서 어떠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정치에 대해 좌우에서 퍼붓는 맹공은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를 유발하여 한국에서의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기 힘들게 만들고, 이러한 정치의 실종이 다시 정치에 대한 회의를 재생한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과로 나타났다시피 이러한 악순환 구조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손만을 들어주었습니다. 정치의 실종은 '혁명적 좌익' 세력을 충원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대중을 규합하여 2MB를 직접 권좌에서 끌어내리자는 식의 해법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직접행동에 의한 혁명적 변화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타파하지도 못할뿐더러 수많은 희생을 낳기 때문에 정당을 선택한 우리들로서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보정당에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2MB 와 한나라당이라는 물화된 보수이념을 물리적으로 몰아내는 방법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히 새겨져 반동세력의 망령을 끊임없이 초혼하는 헤게모니적 인각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은 일거에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재편하는 신적 폭력이 아닌, 정당이라는 진지를 둔 지난한 진지전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운동의 열정을 등에 업고 정권을 쟁취한 노무현 정부가 관료와 재벌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간 이유는 그들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진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집권 후의 과정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닌 정치입니다.
 
 상상력 역시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진지한 성찰과 반성, 고민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떠한 실제적 효과도 낳지 못하는 감정의 발산으로 그칠 것입니다. 극단의 시대를 지나 침체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사랑하듯이 혁명한다' 등의 멋지고 요란한 구호가 나돌며 상상력이 발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정작 중요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8 17:22

 그저께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가더니 어제는 간첩을 잡았다고 난리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10년 만에 간첩이 잡혔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축을 하는 분위기이다. 미안하지만 '좌파정부' 동안 간첩을 안잡은게 아니다. 기초적인 자료는 찾아보고 자축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번 정권 마칠때까지 '좌파정부' 들 보다 간첩을 많이 잡나 지켜보겠다.

 확실히 이 정권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세철 교수의 구속과 여간첩 사건은 분명히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인데(우연의 일치라기엔 발표 시점이 참 절묘하다), 아직도 간첩 타령을 하면 국민들이 색깔론에 놀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릇 간첩사건은 조용조용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첩사건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안보관을 고취' 시키는 것 외에 다른 효과가 있는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는 군의 명예 및 신뢰도와 직결된 문제인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도록 방치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만약 간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이제야 급하게 잡아들이고 국민들의 안보관이 진심으로 걱정되어 발표를 한 것이라면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김정일도 암살하지 못하고 간첩도 제대로 못잡는 한심한 정보기관에게 세금을 낭비하기가 아까울 지경이지만 이미 국정원은 그동안 조용히, 그리고 착실하게 간첩들을 잡아왔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갑자기 간첩을 잡았다고, 마치 지난 10년간 최초로 간첩을 잡은마냥 떠벌리는 것은(물론 기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기삿감이 될 만한 소재이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도대체 왜 그 많고 많은 주사파들은 놔두고 급진 PD인 오세철 교수를 잡아 가두었냐는 점이다. 아마 주사파는 쓸어도 별로 소득이 될게 없기 때문일까? 급진 PD에 용공색깔을 칠하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큰 수확이긴 하다. 노동운동을 확실히 쓸어버릴 빌미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2MB는 노사문제에 대해 '법대로' 대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학계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오세철 교수의 집안이 그렇게 짱짱하다고 한다. 사실 오세철 교수 본인의 경력만 보더라도 2MB 정부의 왠만한 장관들보다 훨씬 화려하다. 그만큼 2MB 로서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넣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큰 행위인데 이러한 짓을 감행했다는 것은 리스크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리스크를 능가할 정도의 수확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소리이다.

 만약 2MB가 생각하는 것이 후자라면, 그리고 이번 간첩 사건과 연계가 되어 있다면 정말 무서운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p.s. 그나저나 오늘 오랜만에 학교에 가봤는데 연세대 총학 이것들은 독도 문제 관련 대자보(총학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규탄시위 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를 아직도 붙여놓고 있다. 하긴 이 뇌용량 2MB 짜리들에게 오세철 교수 구속 규탄성명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과연 여기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지 지켜보겠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06 19:19

 최초의 시민직선에 의해 치루어진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근 3달간 들어왔던 촛불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이익집단 세력을 동원 가능한 공정택에 대항하여 이 정도로 '조직표' 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순전히 촛불의 힘이다. 하지만 이념지형 상에서의 극단적인 대비와 낮은 투표율이 말해주다시피 이번 선거는 이미 입장이 정해져 있던 사람들 중 자신의 편을 얼마나 많이 투표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던, 실질적으로 동원력의 싸움이였고 이 싸움에서 어쨌던간에 패배한 것 역시 현실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구별 득표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서초, 강남, 송파로 대표되는 강남 8학군 라인의 공정택에 대한 몰표가 유독 눈에 띈다. 진보신당 송경원 연구원이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몰표현상이 공정택의 교육정책에 대한 진지한 유물론적 고찰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정택은 '강북 아이들이 강남으로 유입되지 못하게 하겠다' 는 공치사를 날리긴 하였지만 강북 학생이 강남으로 진학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이상(그리고 고교선택제는 정 반대의 제도이다) 이는 '부동산 규제는 하겠지만 집값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라는 공치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공정택을 '믿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급투표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송경원 연구원의 지적과는 달리, 이러한 믿음은 관념적 계급의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 투표는 철저히 계급투표이다. 즉, 자신의 유물론적 이익 보다는 '강남이 선호하는 이념의 교육제도' 라는 가치에 투표를 한 셈이다. 물론 기존의 8학군이 특목고와 자사고로 대체되고 8학군은 강남의 중하위권 학생들 혹은 강남의 상위권 학생들로 채워지고,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8학군보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면 강남의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이익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는 상대평가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남의 학부모는 입시 문제에 대해서는 집값에 대해서 만큼이나 극성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그 기저에 깔린 심리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노후에 대한 투자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순수한 '모성애' 라면 그렇게 그악스럽고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남 학부모들은 '경쟁' 이라는 명제를 택하였을까. 8학군에서 미적분을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과 과학고에서 선형대수를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은, 최소한 강남 학부모들에게 있어서 결과치는 같다. 그들이 원하는건 '세계적 인재',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식이 아닌, '명문대를 나와' '상위계층에 있는'(계층의 구분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학비도 더욱 비싸고 멀기까지 할-아무리 2MB라도 자사고를 강남에 몰아서 짓지는 않을 것이다-특목고와 자사고라는 대안은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 8학군과 강북 학교들의 관계, 그리고 자사고 및 특목고와 일반계 고등학교의 관계는 권력의 구조 면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자사고에서 교육을 받으나 8학군에서 교육을 받으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최상위층에 있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교육의 힘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은 별 다를게 없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자사고라면 사교육을 통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 확률이 떨어질 수까지 있다.

 이것은 모종의 도덕주의적 기만을 말해준다. 노동조합의 조합주의적 행태를 욕하면서도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국가의 경제 발전'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자기세뇌를 한 채 2MB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의 심리와 비슷하리라. 자신의 자녀가 상대적인 계급구조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만 자신도 자각 못하는 사이에 그것이 국가주의적인 성공 담론과 혼재되어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하는 이드와 가치를 추구하는 초자아쯤 될 것이다. 강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도 공정택이 30% 이상의 특표율을 올린 것은 비단 강남뿐만이 아닌, 전 국민적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기만의 실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단지 '여유있는' 강남이 그들의 가치를 좀 더 숙고하였고 그것에 더 강하게 동기를 부여받고 투표소로 달려갔을 뿐이다. 이미 '강북' 혹은 '서민' 과 투쟁하는 대자적 계급으로 자신을 정립한 강남의 주민들은 즉자적 계급의식도 형성하지 못한채 강남의 욕망을 욕망하는 강북의 주민들과 그 적극성 측면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강남의 주민들은 그것이 비록 소외당한 욕망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만들 줄 알고 있다.

 촛불은 사람들의 정의감은 자극하였지만 욕망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생활정치' 라는 호들갑은 역설적으로 상존하는 욕망에 의한 정치의 힘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결국 의식의 차원에 있는 정의감에서 투표소로 달려간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겉으로는 '경쟁 교육이 국가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초자아의 외피를 둘러쓴- 사람들보다 그 수가 적었다. 아마 에리히 프롬의 말이였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바꾸지 않고 모두를 중산층으로 만드려 했기 때문이라고.

 예상보다 선전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패배한 것은 패배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정의는 그들의 욕망보다 치열하지 못했던 것이였고, 우리는 욕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놓고 욕망할 수 있는 정의의 언어-경쟁력, 국익으로 대표되는-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강북의 학부모들 마저 강남의 언어에 포섭되어 공정택을 욕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욕망을 둘러싼 담론은 2MB 가 당선된 지난 대선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시작된 촛불정국에서 욕망이라는 소재는 '민중의 생활에서 나온 요구' 이라는 초월적 당위성으로 포장된 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다.

 이번 교육감 선거의 결과에 실망을 하거나 분노를 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이용' 할 것인지 '개조' 시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보는 각자에게 맡기겠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연애를 금지하고 무한경쟁의 틀에 학생들을 몰아넣는 공정택 체제에서 자란 학생들은 무엇을 욕망하게 될까?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7/08 19:12
  현대 과학의 최첨단 분야 중 하나인 양자역학은 다소 특이한 한계점을 전제하고 있다. 관찰행위 자체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관찰하는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굳이 복잡한 과학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전제는 아마 사회과학에도 적용가능 할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자신이 관측하고자 하는 계(System) 속에 속해있기에 관찰이 곧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미한 행위가 되듯, 사회과학자 역시 자신이 관찰하고 논평하는 사회 속에 속해있기에 그의 관찰과 논평 역시 사회 속에서 하나의 변수가 된다.
 
  현재 촛불 정국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성을 외치며 촛불에 대해 온갖 논평을 쏟아내는 지식인들과 상당수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 사회에서 관찰자와 행위자를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에 한정 지으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무형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들이 행동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잃을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사명감뿐인 학생이 이미 가족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정의를 위해 소유를 내려놓으라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썩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이는 성숙하지 못한 행위이며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아도르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문제는 '편향적' 인 행위자와 스스로 구분을 지으며 '객관적' 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구세력의 신성동맹이 내는 반동적 목소리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후자가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과 정서과잉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가 없는 코미디로 수용된다면 전자는 세련된 외양을 무기로 공론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목소리 자체로 현실을 재창조한다. 현재 촛불정국에 대한 여론은 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의 열정적인 체험담 외에도 수많은 관찰자들의 목소리 또한 가미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론' 은 촛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행위를 하지 않는 관찰자들은 무엇을 관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들이 촛불집회의 모든 순간에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몇 번의 참여에 따른 단편적인 인상 혹은 언론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현장의 최전방에 있던 자만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책임감 없이 단편적 이미지에 휩쓸려 아우성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반동적 언론에서 주어진 이미지에 휩쓸리는 목소리들은 가장 위험하다. 이들 언론의 보도만 보자면 현재의 촛불 정국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혁명의 상황에 가깝다. 전경을 집단 구타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목소리는 혁명에 열광하는 목소리와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행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유혈 혁명에는 생래적 거부감을 지니고 있기에 촛불 정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반동적 언론들의 전략이자 '객관적' 관찰자들의 한계이다. 이들의 폭력비판은 공허하다.
 
  근본주의적 폭력비판은 실질적으로 소용이 없다. 기껏해야 전경과 시민 모두 잘못하였다는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누가 먼저 때렸나' 라는 검증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폭력적' 이고 '비이성적' 인 행위자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키며 '비폭력' 과 '이성' 의 영역에서 훈수를 둔다. 반동적 목소리들은 훈수의 재료를 제공한 뒤 터져 나오는 관찰자들의 세련된 훈수 뒤에 자신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숨긴다. 그리고 훈수가 행위자들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잠재웠을 때, 이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은 비수가 되어 관찰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행위자들을 찌른다. '일반시민' 들인 관찰자의 이름으로.
 
  여기에 관찰자들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순수하다. 시민에 대한 전경의 폭력과 전경에 대한 시민의 폭력 양쪽 모두에 분노하며 노무현의 악덕만큼이나 2MB의 악덕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노무현 정부 시절이나 2MB 정권 시절이나 '운동권' 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무감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사진예술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이미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듯, 맥락이 거세된 단편적 이미지는 이들의 순수함을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며 농락한다. 벤야민은 비판정신을 마비시키는 사진의 순간적 이미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표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미 반동적 언론들은 자신들만의 맥락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자제로 표제를 붙여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 안에서, 이들의 표제는 사진의 '진실' 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와 사진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동적 언론의 매트릭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수한 렌즈로 관찰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직접 촛불 집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수선한 집단 객기쯤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 시각은 더 이상 '객관적' 이지 않다. 아마 전쟁터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현실 정치 영역의 권력 게임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는 존재하기 힘들다. 행위자 혹은 자원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행위는 아니다. '과격 행위자' 와 '부정적 시선으로 관망하는 시민' 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나는,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중하고 올바른 관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사회참여 행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변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에 반해 순간적 이미지에 휩쓸려 감정적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객관적 관찰' 과는 거리가 멀며 어떠한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행위자들과 애초에 선을 긋고 무책임한 논평, 아니 감정의 배설을 쏟아내는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기성취적 예언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촛불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신중을 기해 말한 방향제시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허공을 맴돈다면 관찰자들의 목소리는 관찰자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이 되며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반동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포장하며 또 다시 관찰자들은 그러한 보도에서 '판세' 를 읽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에 맞춘다.
 
  거리에 나올 용기와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판단할 책임감 중 어느쪽도 갖추지 않은 채 '쿨' 한 척만을 하는 관찰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질 미래는 역시 차가운 미래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의 촛불 정국은 확실히 87년 6월과는 다르다. 하지만 87년 대선과 같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를 택일해야 하는 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 역시 순수한 선과 변혁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2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았을 때 '관찰자' 들의 상당수는 최소한 순수한 선을 택할 완고한 도덕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코를 틀어막고 2MB에게 투표를 하였다면 변혁을 위해 촛불의 몇 가지 소소한 악덕쯤은 감수하고 다시 한 번 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도 '나는 찍지 않았습니다' 를 무기력하게 외칠 것인가.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
망상의 변주곡2008/06/29 16:27

우선 원본 대국민 '협박문' 부터 감상을 하자.

http://www.frontiertimes.co.kr/news_view.html?s=FR01&no=28791&s_id=9&ss_id=0

자작 대정부 단독담화문

존경이 되지 않는 2MB 일당들!

어제 저녁, 또 다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과격 폭력 진압이 벌어져 시민과 경찰 양쪽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전경이 곤봉과 방패로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빈 소화기통과 보도블럭까지 시민들에게 던져댔다. 나아가 쓰러진 여성을 발로 마구 밟는 일까지 발생했다.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분노의 뜻을 표하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나와 부상을 당한 전의경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시민들은 그 동안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재협상을 주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한때 2MB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는 척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태도 역시 2MB의 사과문과는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쇠고기 문제 뿐만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경찰의 진압 양상도 날이 갈수록 과격 폭력화 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은 오늘 일요일, 개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위한 후안무치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그 동안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정부의 자정능력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노력하며 인내를 갖고 정권퇴진 운동을 최대한 자제해 왔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숙였던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주도의 MB노믹스의 강행, 80년대식 진압을 다시 꺼내들면서 급기야 어젯밤과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가 재발한다면, 시위에 참여한 일반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는 절대로 막아야 한다. 시민들로서는 불법 폭력 과격 진압에 의한 불행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소화전을 이용하는 등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격 폭력진압을 조장 선동하거나 극력 폭력행위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기록, 추적해 국민의 심판을 내릴 방침이다. 파괴된 방송장비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민사상의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망발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2MB 일당들!

이번 시위와 관련해 전의경들의 부모이자 친구인 시민들이 밤낮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젯밤에도 수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부상당한 시민들은 총 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10개가 넘는 농성천막과 140여 점의 농성장비도 파손됐다.

2MB의 집권이 네 달이나 계속되면서 자영업은 물론 우리 경제 전체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국가신인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외국 투자자와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전 세계가 유가급등으로 위기에 몰려있고, 특히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2MB가 대통령으로 있을 경우 누가 우리나라에 믿고 투자하겠습니까?

2MB의 집권은 서민경제를 죽이는 일이고, 그 피해는 묵묵하게 일하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이런 현실은 아직까지도 시민들께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균형있는 보도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들이 시민들께 전달될 수 있도록 조중동의 회개를 당부드린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시민들의 고충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실 것을 거듭 요청드린다.

또한 한나라당도 개념없는 성명서를 철회하고, 미 쇠고기 재협상을 즉각 당론으로 정하기 바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민의를 대변하여야 할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 시키는 데 역량을 모아나가야 할 때다.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정책을 수행하는 성숙한 국가 운영역량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Posted by 데학생
망상의 변주곡2008/06/17 01:13

-2MB 요정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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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예전에 쓴 글(2MB 탄핵에 대한 단상)에 나타나 있다시피 나는 5월 초만 하더라도 촛불문화제의 가능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대운하나 공공부분 민영화 등 한국의 중장기적 사회경제적 체제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산적한 거대 이슈들을 놓아두고 그 확률도 매우 미미한 광우병 이슈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대중을 보며 어느정도는 냉소를 보내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선을 거쳐 4월달의 총선 패배를 겪고 나니-게다가 내가 선거운동을 뛰었던 후보 사무실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패배를 목도하였다- 한국의 대중에 대한 실망과 불신감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는 말로 미약한 변명을 해본다.

 여하튼, 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촛불문화제에 모인 시민들은 나에게 멋지게 어퍼컷을 날렸고, 나는 5월 2일 이후로 꾸준히 촛불문화제와 가두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기말고사와 논문을 쓰느라 바뻐 촛불시위 출석이 뜸해진 요새 와서 생각해보건데 2MB 요정설은 통찰력이 있는 주장인 것 같다.

 기억해보자. 촛불이 시들할때마다 여기에 불을 부은 것은 시민들의 열정과 아이디어 이전에 2MB 의 삽질이었다. 지속적으로 부어주는 배후설과 간간히 터뜨려주는 돌출 발언, 그리고 강경 진압은 그만큼의 강한 반발을 수반하였고 이 반발은 고스란히 촛불의 기름이 되었다.

 촛불시위가 가두로 나올 수 있도록 계속 귀를 막은채 먹사들과 대화하던 2MB는 시위대가 가두로 나와 논란이 될 법한 시기에 25일 신촌의 진압 크리를 날려줌으로 가두시위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며 시위대의 상황판단능력 역시 대폭 증가시켜 주었다.

 그리고 6월 1일, 피의 일요일은 2MB가 국민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함양시키기 위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은, 절대정신의 각성 기념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의 '지령' 이 떨어지자마자 아고라의 노빠들이 청와대 진격 무용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최소한 그 전까지는 청와대 진격이라는 행위의 부적절성보다는 경찰의 폭력진압이 주요 이슈였다.

 또한 촛불의 중요한 고비였던 6월 7일 저녁, 프락치 논란까지 있던 폭력사태에 대한 목소리가 일파만파 확산되기 시작하여 6월 10일 시위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지던 시기에 2MB는 명박산성이라는 기상천외한 아이템으로 벼락치기 인력동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아마 명박산성을 보고 온 사람들이 최소한 몇만명은 될게다. 명박산성과 더불어 81년생 북파공작원이 존재하는 가짜 HID 는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데에 톡톡히 기여하였다.

 결국 명박산성의 가호로 6월 10일 시위를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치루어내었지만 청와대의 리액션도 미적지근한 데다가 추후의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지 않아 지쳐가던 시민들. 하지만 역시 우리의 2MB 요정은 시민들이 지쳐가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어 LPG 가스통과 함께 고엽제 전우회를 여의도에 파견하사 시민들이 오랜만에 운동도 할 겸 운치있게 야경을 보며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곧 장마철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데, 비가 내리기 전부터 2MB 요정은 역시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오늘은 길고 긴 장마철을 맞이하여 3종 세트이다. 오전에는 김종훈의 옥쇄 크리, 오후에는 이랜드 홈에버(신실한 박성수가 운영하는 그 이랜드 맞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지니....)의 쇠고기 원산지 위조 크리, 밤에는 촛불시위 생중계의 메카 아프리카 TV 대표 긴급구속 크리.

 아마 내일 ASEM 회의때 세계 각국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늘 하루에 몰아서 일들을 터뜨려 주었나 보다. 대책위 측에서는 2MB에게 20일까지 기한을 주었는데 과연 20일 당일날에는 또 무엇을 하사해 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노무현 시절,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을 택하였던 괘씸한 시민들에게 몸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체험시켜주는 2MB 요정의 국가와 시민에 대한 배려와 사랑 앞에서 나와 같은 룸펜은 그저 조용히 그분의 희망에 따라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