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사회학2009/06/24 22:59

요약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반영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정치적 반영, 과도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 정책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같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집권 과정부터 집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정당정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퇴행시키며 스펙터클에 의한 동원참여를 이끌어 내는,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에 의존하였다.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욕망에 충실한 한국의 중간계급이며 이들은 노사모  · 촛불과 같은 동원참여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정치적 정서를 표출해왔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에서 나타나는 정서 역시 노무현의 실제 정책과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정치적 평가보다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동일시 대상의 죽음과 영결식의 패전트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참여는 반정치적 정서를 재생산하며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독으로 작용한다.


 이 글의 목적은 노무현 추모 열기라는 현상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나 단편적 분석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라는 통시적이고 거시적인 과정 내에 현상을 위치시키고 바라보는 데에 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이명박과 같은 개인의 가치관이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당정치 구조의 부실과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다. 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협애한 이념적 대립 축을 중심으로 갈등하는 정당체제는 인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며, 다원주의 없는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최장집, 2005).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어가던 시점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헤게모니와의 대면과 타협,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의 덫에 갇혔으며 사회적 갈등의 발현을 억압하는 통합이데올로기, 과도한 도덕주의, 민주적 가치와 위배되는 전문가주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도한 도덕주의를 내세운 정당개혁과 리더십의 문제는 오히려 정당과 시민의 연계 고리를 파괴하였으며, 헤게모니와의 타협과 통합이데올로기에의 포섭은 정당의 갈등축을 흐리게 하여 전반적인 정당구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최장집, 2006: 75-91).

 

이러한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선택하였던 방법은 정당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 즉 스펙터클을 통한 대중의 동원참여(박동진 외, 2006: 64)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웠던 정치적 스펙터클의 전형은 지역주의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경제적 갈등 축을 직접적 대변하고 돌파하기 보다는 초지일관 ‘지역주의 타파’를 제일의 정치적 동원기제로 활용하였고, 더 나아가 지역주의 문제를 참여정부의 정치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강병익, 2007a: 88). 하지만 지역주의 문제는 한국정치의 근본모순을 구성하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갈등축의 억압에서 기인한 종속변수일뿐더러, 이에 대처하는 노무현 정부의 방안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박상훈, 2005). 더욱이, 노무현 정부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제안한 정책들은 지역주의의 해소보다는 대부분 당시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각주:1]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는 진영이 명확하고 도덕적 열정을 추동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이끌어냄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열정적 동원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스펙터클의 구체적 결과가 체감되지 않을 시에는 오히려 참여자들에게 피로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줌으로써 냉소주의를 심화 · 확산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의 축을 재정의 하는 데에 대규모의 정치자원을 투입함으로써 사회의 근본모순을 규정하는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억압하고, 스펙터클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샤츠슈나이더, 2008). 이는 도덕적 열정에 의한 스펙터클에 대한 중간계급[각주:2]의 매혹,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대변하지 못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혐오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반하는 반(反)정치주의로 귀결된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는 지역주의나 탄핵 문제와 같은, 진영이 전국적 규모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하고 이에 대한 도덕적 열정을 동원하는 방식의 정치를 시행하였지만, 담론과 실제 정책의 내용은 괴리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에 의한 정치는 정치적 스펙터클의 강력한 동원자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반정치적인 경향으로 귀결되어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가 연출한 정치적 스펙터클을 도덕적 스펙터클로 받아들인 중간계급이다. 중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의 확대와 중간계급 의식을 반영하는, 철학과 가치관이 결여된 절충적 · 덕담 수준의 지속적인 ‘욕망의 정치’ 의 확대는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귀결을 방증하고 있다(강병익, 2007b).

 

촛불을 거쳐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드러난 일련의 흐름은 위와 같은 계급 편향적이면서도 보편담론을 표방하는 중간계급의 허위의식이자,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와 심정윤리만을 강조하는 반지성주의 및 반정치주의의 포괄적인 총체이다. 촛불은 환등상(phantasmagoria)으로 어른거리다 사라진 근대성의 그림자이자 거대한 스펙터클로서 도시의 중간계급을 유혹하는 욕망의 기제였다(이택광, 2009). 또한 유사과학과 괴담에 의해 추동되고 이론의 빈곤을 배태하고 있는 반정치주의와 탈정치화의 통로였다(백승욱, 2009). 촛불을 통해 나타난 흐름은 이른바 ‘촛불시민’ 이 다시 거리로 나온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노무현의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냉정한 이론적 고찰은 사라진 채 유시민 전 의원 류의 유사이론(유시민, 2005)에 의거하여 진중권 중앙대 교수,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와 같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규탄과 성토가 나타났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 라는 이름이 삼성경제연구소의 아이디어라는 점과 노무현과 이학수의 개인적 유착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고 있지 않다.[각주: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그가 생전에 동원하였던 지역주의, 개헌 등과 같은 스펙터클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얽힌 내러티브와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상징 및 이미지가 정치적 공간을 혁명적으로 재편한다. 이는 후보의 정강 대신 현직 의원의 기록에 투표하는 경향, 의사소통 기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미디어적 인물(media figure)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현상의 반영(마넹, 2004: 266-269)이다. 정당의 이합집산은 스펙터클이 될 수 없지만 정치인 개인의 죽음은 거대한 스펙터클이 된다. 이 시점에서 정치는 다시 스펙터클로 환원된다. 이명박 정부는 세심한 정책적 비판의 대상이 아닌, 선과 악의 결전이라는 스펙터클한 구도 속에서 타도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상정되며, 정치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영논리와 십자군적 열정에 의해 재배치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이러한 감정적 스펙터클이 물질적 패전트로 물화(Reification)됨으로써 스펙터클의 정점을 이루며, 그 동원효과를 극대화한다.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記意)를 학습시킨다. 하지만 권력의 기의는 패전트를 연출하는 현실권력의 의도대로 각인되지는 않으며, 대중이 패전트에서 경험하는 것은 현실권력의 ‘성격’ 이 아닌 권력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경험한 대중은 권력의 기표(記標)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죽은 노무현은 일본 근대 초입, 메이지 천황이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랬듯 영결식을 통해 순행(巡行)을 실천하였고 시민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시민들은 여기서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며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후지타니, 2004: 301-30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통상적 반응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분명 의사(擬似) 수호자주의이며 현실 정치의 원칙으로 삼기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달, 2006: 112-168, 301-30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이명박 전선’ 으로 결집된 정치권은 노무현 추모 열기를 정치적 자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노무현 추모 정국에 동참하는 대부분의 중간계급은 스펙터클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 이라는 통합 이데올로기에 의한 진영재편은 배제되고 억압된 계급에 대한 동정과 멸시의 자세로 표출되며 이는 실질적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현대정치의 특징 중 하나인 욕망에 의한 정치에 대한 급격한 반동은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과도한 도덕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며[각주:4],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욕구의 반지성주의적 표출은 정부의 대내 자율성을 저해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파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보비오, 2007: 126-132).

 

정리하자면, 현재의 노무현 추모 정국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평가나 정책적 고려가 결여된 채 이루어지고 있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자 반지성주의, 과도한 도덕주의, 의사 수호자주의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이명박의 좋은 아버지(buon padre)버전에 불과하다.[각주:5] 따라서 노무현에 대한 추모 열기는 결코 특별하고 위대한 도덕성의 표출이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의 연장선상에서 국면적으로 발현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갈등축을 폭력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사회의 진정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열정의 동원참여에 의한 최대강령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이성적 과정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기여를 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열망과 절망의 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더욱 깊게 재생산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파국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징후이다. 

 

참고문헌

 

강병익a,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의 리더십”,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창간호 pp.77-90

______b “철학도 실체도 없는 보수정치의 중도론”,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5 ․ 6월호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 2004

달, 로버트(Robert A. Dahl),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 지성사, 2006

마넹, 버나드(Bernard Manin),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박동진 외, 『인터넷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박상훈,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2일자

백승욱,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보비오, 노르베르토(Norberto Bobbio),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2007

샤츠슈나이더.E.E.(Elmer Eric Schattschneider), 『절반의 인민주권』, 후마니타스, 2008

시사IN, ‘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2007년 11호

유시민, ‘나는 더 중요한 정치인 되고싶지 않다’,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6일자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

______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______ “촛불의 매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______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연세대학교 시국토론회 발제문

  1.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이 도입하려고 하였던 전두환식 2인 중선거구제도는 지역주의 해결에 대한 노무현 정부 및 집권여당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중선거구제는 사실상 비례대표제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STV식(아일랜드에서 사용)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용하다 폐지한 SNTV식을 도입을 주장한 건데, SNTV식 중선거구제는 단순다수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보다도 못한 제도이다. 또한 비례대표제 역시 노무현의 주도가 아닌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스펙터클화하여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중선거구-이원행정부제 논의는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본문으로]
  2. 중간계급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이택광,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과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를 참조. [본문으로]
  3.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서다가 좌초한 노무현이라는 신화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삼성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집권기간 전반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며, 삼성 X 파일 사건에 대해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가운데 도청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 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행태로 일관하였다(‘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시사IN, 11호). [본문으로]
  4. 흥미로운 점은 중간계급의 도덕주의는 청교도적 금욕주의 보다는 ‘욕망의 평등’ 에 대한, 분배적 정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의 정치적 휩쓸림은 이명박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던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편입 욕망이 좌절되자 욕망의 평등이라는, 즉 각개약진이 실패하자 일종의 연대전술을 취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연대는 그들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부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로 귀결된다. [본문으로]
  5. 어청수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기용되었으며, ‘명박산성’ 은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회의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행 집시법 역시 노무현 정부의 유산이다. 또한 임채진 검찰총장 역시 노무현이 두둔한 ‘삼성 장학금’ 검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무현에 대해 신화가 만들어지고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것은 유사역사가 가지는 판타지에 대한 매혹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정치2009/01/15 13:22

 최근 해외에서 골프를 치다가 적발(?)된 민주당 의원들이 졸지에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여론의 비난부터 시작해서 한나라당의 비난, 설상가상으로 당 지도부의 압력까지 난리도 아니다. 사실 정치권의 비난은 낯부끄럽기는 하다. 국내에서 몇천만원어치의 명품을 사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몇십만원을 내고 골프를 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해외에서 골프를 쳤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얼마전 수구언론에서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한복이 350만원이라는 정보를 흘리며(물론 우리 2MB 대통령의 양복값은 몇천만원이다) '가난한 농민 대표' 의 '가식' 을 비난하는 한편 한나라당의 전여옥 의원은 민주당 의원들이 서민을 외치면서도 자식을 해외로 유학보낸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조선일보 사주의 양복값 및 한나라당 의원들의 자녀교육비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제쳐 두더라도 이러한 공방이 오가는 것은 이 공격이 효과가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의 골프외유가 만드는 파문의 범위와 위와 같은 공격의 효과는 거의 일치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정치에 대한 과도한 도덕주의적 접근은 정작 정치의 핵심적 쟁점들을 가리는 최면으로서 작동한다. 의정시간 외의 여가시간에 의원들이 하는 행위는 그것이 마약이나 난교파티와 같이 사회의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이거나 대가성 접대만 아니라면 문제될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회사 동료들이 당신의 취미생활을 놓고 왈가왈부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니 그것을 떠나서 그러한 행위가 정당하다고 보는가? 평범한 샐러리맨이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를 보았다고 해서 회사동료들에게 사죄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정에 일이 생긴다고 24시간 심각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듯이, 그리고 우리의 수입 범위 내에서 여가를 즐기듯이 민주당 의원들을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사실 '해외 골프' 의 비용을 따져보면 그리 요란한 규모라고 보기 힘들다(그들의 해명을 믿는다면). 그들이 다소 경솔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도 그들을 어느정도 이해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기에 혈안이 된 것은 결코 자신들이 깨끗해서가 아니다. 한나라당의 행태는 시민들의 건전한 도덕감정을 이상한 쪽으로 발산시키기 위한 고전적인 여론몰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저들의 속보이는 술책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정치인에게 기대해야 하는 덕목은 의정수행 능력과 정치적 신념의 일관성이지 청렴결백함과 금욕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지 선지자를 선출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에 선지자는 2MB 하나로 충분하다. 물론 그는 가죽을 걸치고 조청과 메뚜기로 연명하였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최고급 양복을 걸치고 호텔에서 만찬을 즐기는 조용기에 가깝지만 말이다.

 우리는 정치인들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능력과 신념에 대한 평가가 되어야지 그들의 금욕성에 대한 평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맑스와 함께 인터내셔널을 이끌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엥겔스가 부르주아들의 파티에서 와인을 즐겼다고 해서 엥겔스가 노동자들의 감정을 무시한 더러운 부르주아가 되는 것은 아니잖는가. 정치에 대한 과도한 도덕주의적 재단은 진정한 갈등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정치인들은 자신의 문제점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악덕을 증명하는 것을 효과적 무기로 삼게된다. 요컨대 잘못된 정책으로 100억을 날려먹었다면 그것을 해명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지적한 의원이 10년전에 밀라노에서 루이비통 가방을 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여론의 포화에서 벗어나기에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루이비통 가방의 가격에 분노하는 동안 100억의 책임소재는 사라진다.

 이러한 경향이 늘어나는 것은 결국 시민들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익의 침해로 다가온다. 문제를 제기한 주체가 도덕적으로 매장당하면 문제도 함께 매장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리한 것은 상대방의 영수증을 파악할 수 있는 더 나은 정보력을 갖춘 집권세력이다. 집권세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영수증과 함께 분쇄기로 들어간다면 누가 그들을 통제하며 일반 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도덕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아마 집권세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있는 것은 극소수의 종교인들 뿐일 것이다. 정치는 이상주의적 목표를 가지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2MB 에 대해서 코를 막았다고 해서 그 반동으로 코에 흡입기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Posted by 데학생
망상의 변주곡2008/07/17 20:01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17일 "노동자의 파업은 도덕적 정당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며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의 도덕성이란 (노동조합이) 행동을 자제하고 위기 극복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희 장관은 이날 노동부 출입기자와 만나 "(민주노총이) 우리 경제를 걱정하는 근로자의 대표라면 탄압 운운할 것이 아니라 자성해야 한다"며 민주노총을 맹비난했다.

 '미국산 쇠고기 저지' 총파업에 대해서도 이 장관은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지만, 생산·산업 현장은 정치와 무관하게 쉴 사이 없이 움직여야 한다"며 "우리의 법은 정치적 파업이 허용돼 있지 않음에도 민주노총이 '현 정부를 무릎 꿇린다', '생산 질서에 타격을 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영희 노동 "민주노총, 탄압 운운 말고 자성해야">, 프레시안, 7월 17일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이익집단운동으로 전락했다” 라든가, “초심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하며, 가거의 도덕적 가치를 불러들이고 이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개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이들 운동이 더 이상 과거의 도덕성을 견지할 수 없는 것은, 거시적으로는 민주화라는 정치적 조건의 변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경제발전에 의한 노동시장 조건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미시적으로는 운동에 헌신하는 개인이 자기 이익에 반해, 그리고 인간의 행복 추구 욕구에 거슬러 지속적으로 도덕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도덕주의적 운동은 네메시스의 제물이 되는 처지에 놓인다. 운동의 도덕화와 현실간의 괴리가 커지면서, 결과적으로 운동의 도덕성 위기라는 역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애초 내세웠던 도덕성의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이 도덕주의를 통하여 노동자를 이롭게 하는 무언가의 수행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 반노동적인 보수파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가혹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최장집,  p.72-73


2004년 기준 GDP 세계 10위, 교역량 세계 12위의 OECD 가맹국가라는 사실과 대비하여, 한국의 노동자들이 사회경제적 차원의 보편적 시민권을 여전히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치부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는, 핵심적인 생산자 집단으로서 조직노동자를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그리고 노사관계에서 기업의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이른바 사회통합적 의식혁명을 갖지 못했다. NL적 문제의식과는 달리, PD적 문제의식은 현실 속으로 투입되지 못한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냉전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성장이데올로기가 중첩되면서 완강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결과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는 노동관련 의식에 관한 한 철저하게 계급적이다. 한국 사회의 상류층과 중산층, 나아가 한국인 일반이 노동에 대해 갖는 인식은 분명 계급적으로 차별적이다.

 민주정부의 지도자들과 노동정책의 결정자들이 노동과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인식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기반해 있다. 현 정부가 비정규직 입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정규직 노조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다. 정규직은 강성노조의 보호를 받으며 고용보장, 높은 임금, 풍부한 사내복지를 누리는 일종의 노동귀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친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이 혜택을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과 나누어 갖는 도덕성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파생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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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공익,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서 공익이란, 노동자의 역할은 묵묵히 기업의 이윤 창출에 봉사하고 그것이 모아져 국민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하며 여기에 장애가 될 만큼 높은 임금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들의 이익표출과 요구는 파업이나 농성과 같은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거나 더욱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떤 다른 집단보다도 법의 지배에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최장집, p. 153-154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