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사회학2009/04/21 16:23

...국가는 이미 진정한 혈통관계로 맺어진 가족국가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시원을 단군으로 보는 시각은 이미 1898년에 관찰되며(「皇城新聞」, 9월 5일), 그리고 같은 신문의 1905년 사설 ‘國家思想論’에서는 국가를 “一致團結의 血性”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2월 16일). 이러한 시각은 이후 더욱 발전되고 넓게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국가관은「大韓每日申報」,「皇城新聞」그리고「西北學會月報」등지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어,「皇城新聞」의 1909년 4월 21일 사설은 단군을 “聖祖” 와 “國祖”로 지칭하여, 단군을 기원으로 한 가족국가관을 제시한다. 다른 예로 「西北學會月報」의 한 기사 “國家論의 槪要(續)”는 국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所謂 民族이라 云者 家의 集合體로 家에 家長이 有과如히 族에도 亦 族長이 宥야 家族이 家長을 崇拜야 此에 服從과 同一의 思想으로 以얏도다. 凡家族은 共同의 始祖로 一族의 長을 崇拜고 其 權에 服從며 族長은 凡家族의 長으로 族 全體를 統御는 地位에 立者라. 此 卽 血族團體라 稱 者라. 國家의 始原은 洋의 東西와 國의 文野를 不問고 可던지 一家一族의 制로 始하야 成고 特히 我邦이 最著야 或은 此를 稱하야 血族的 國家라 稱니…”

 

가족으로서의 국가, 혹은 가족국가는 보편적인, 따라서 자연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형식으로 도입되었으며, 이 개념을 통하여 구체적 민족주의 담론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국가관념 및 가족국가관과 함께 주목할 부분은 일본의 천조대신과 대응적으로 단군이 조선 민족의 조상으로 불리게 된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삿사 미츠아키(佐佐充昭, 2000; 2001)의 독창적 연구들은 어떻게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가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관해 잘 논증하고 있다.

 

천황의 지위와 권력은 메이지 이전 시대에는 단지 명목적인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를 통하여 단군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천황이 메이지 시기에 새로운 전통으로 “발명” 된 국가종교인 국가 신도의 상징적 중심이 되었듯이, 한국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일본의 전통종교에 비견할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민족 종교”인 단군교(대종교)는 1909년 나철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공포되었는데, 이 때 이들은 이 민족종교가 이미 수천년 전 창설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광”(重光)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채오병, "민족형식과 민족주의", 2007, 한국사회학 제 41집 4호

 이상의 내용은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후맥락을 설명하자면 조선의 초기 엘리트들은 이미 조선과는 달리 국민국가를 완성한 일본(제국)의 민족주의-국가주의에 강한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만의 민족주의를 만들지만 '민족' 과 '국민국가' 의 구성요소라는 프레임은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한다. 예컨대 F15 전투기를 만들기 싫어 라팔을 만들더라도 날개와 콕핏, 랜딩기어 등의 구성 요소들은 꼭 포함시키는 것이다(물론 모양은 다르지만). 논문에서는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반발, 헤게모니적 인각' 이라고 표현한다. 제국의 이념과 식민지의 이념이 이데올로기적인 내용물은 서로 반대되지만 더 큰 사고의 틀인 헤게모니적 차원에서는 양자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헤게모니적 인각이 가장 잘 나타난 사례가 바로 단군신화이다. 독일 국가학의 이론적 대부인 헤겔에 의하면 국가는 '자연적 측면'(탄생, 핏줄, 관습, 전통 등) 에 입각한 강제조직이다. 따라서 독일 국가학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자신들이 창조한 국민국가를 가족국가의 형태로 설정한다. 즉, 국민이 사회계약을 통하여 국가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혈통을 통해 국가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혈통의 정점은 바로 메이지 이후 새롭게 정치적 상징으로 부상한 천황이다. 메이지 이전까지는 일반 인민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거나 천황에 대해 민간신앙의 신들과 비슷한 희극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여신(천조대신)에 대한 신화도 보편적이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민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위한 도구로서 천황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천황으로 혈통이 이어지는 창조신 아마테라스 여신의 신화를 내세워 천황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위치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모든 일본인의 혈통적 시조로서의 천황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직접적 자연성에 바탕을 둔 인륜적 정신인 가족의 형태가 더 큰 인륜으로 확장되는 형태인 가족국가 모델에서 국가의 지배자는 계약을 통해 주권을 위임받은 에이전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질서를 통해 신에게 권위를 위임받은 가부장이 된다. 따라서 지배자로서의 천황은 국민에게 그 정당성을 승인받을 필요가 없으며 가부장의 권위를 통해 일본이라는 가정을 통치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국가 모델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어, 메이지 천황의 시찰 당시 사람들은 메이지 천황에게서 위엄있는 근대군주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의 시선까지 느꼈다. 이는 국민들의 충성심 진작과 국가의 통합에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제국 일본 및 서구 열강들의 이권침탈에 골머리를 썩히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통합된 가족국가 모델을 통해 강한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며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아마테라스 여신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신토(神道) 의례의 발명 및 국가적 장려와 같은 수단이 불가능하였으며, 역성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왕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혈통적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요컨대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고 황실이 유교전통에 매몰되지 않은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혈통적 권위를 종교적 차원에서 내세우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자신들이 조선인의 시조이자 혈통적 아버지라고 자처한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이씨왕조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일부 엘리트들은 국민통합의 수단으로서 이씨왕조를 버리고 새로운 상징을 발굴해낸다. 그것이 바로 단군이다. 단군은 이론상으로(?) 조선 민족의 혈통적 시조이기 때문에 가족국가의 구심점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단군민족' 이라는 경계설정이 가능해진다. 아마테라스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과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은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해질때 양자는 각자의 독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 1> 에서 보다시피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에 나타난 '민족적 의식' 의 대다수는 일본의 그것들과 일대일로 대응한다. 이는 이러한 '민족적 의식' 들이 그 당시에 민중들 사이에 이미 퍼져 있었다기 보다는 일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대응으로써 발명 혹은 발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앞에서 간략히 이야기했다시피 일본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의 가족국가 모델에서 그 형태를 차용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중등과정에서 배우는 윤리교과서에는 상당히 위험한 헤겔적인 가족국가관과 단군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당시 조선은 자신만이 단군의 직계 후계자라고 내세울만한 주체가 없었기에 일본의 천황제와 같이 혈통적 민족주의가 물화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통령 대신 왕검이 통치하는 입헌군주국이 되는 것은 면하였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민족의 화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민족주의의 광기를 동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울 독재자가 나타나기 어렵게 만든다. 2차 대전 당시 천황은 가부장의 권위에 호소하여 신민을 동원하였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붉은악마를 개인을 위해 동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위험성은 상존하는 법. 우리는 그 동안 중등교육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었던 '발명된 민족' 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는 시민적 연대를 통한 사회이지 혈통적 유대를 통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1 11:05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은 1871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패배 이후 프랑스의 철광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역사 역시 이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17 02:31

 1945년 8월 15일이 아닌, 1948년 8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광복절’ 이 아닌 ‘건국절’ 이라는 명칭에 익숙한 사람은 아예 극소수에 불과하다. 의도적으로 건국이라는 표현을 각인시키려 애쓰는 것 자체가 집단의 기억 속에서 광복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가 강고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하지만 뉴라이트 학계를 등에 업은 2MB 정부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기 위하여 건국 60주년을 강조한 8.15 기념행사를 강행하였다. 그 동안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뉴라이트 학계의 주장과 최근 건국절과 관련된 이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이들이 멀쩡한 광복절을 놓아두고 건국절 이라는 생소한 명칭에 집착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일단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고도의 지적 훈련을 거친 학자 집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해석투쟁과 집단기억의 선별 작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난 10년의 민주화 정부를 명분만 내세운 무능한 세력으로 낙인찍은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레토릭은 이들의 최고 성공작이다. 그렇지만 안티테제만으로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헤게모니 구축이 힘든 법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국민들의 세계관 자체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맞도록 개조할 필요가 있었고, ‘경제 대통령’ 이라는 구호로 현재를 개조한 이들이 눈을 돌릴 곳은 세계관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영역이다. 그리고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천박한 경제동물 및 신실한 국가주의자의 이중적 면모-위대한 박정희는 시장주의자였을까-를 과시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통한 강대국의 건설’ 이다.

 2MB의 출신지역에 대한 논란이 보여주듯 내셔널리즘이 유독 강한 한국에서 일본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는 반동 세력들에게 있어 하나의 원죄에 가까웠다. 기존의 올드 라이트가 이 논란을 회피하는 데에 급급하였던 반면, 경제를 내세우며 헤게모니를 어느 정도 장악한 뉴라이트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이 논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즉, 친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도 정당한 행위였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건국절 이라는 명칭 자체에 친일적 요소가 반영된 것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대로 1948년 8월 15일 법적으로 건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엄연히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광복절을 대체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뒤에 깔려 있는 의도가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뉴라이트 세력의 지상목표는 경제발전을 통한 강대국의 건설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실력양성론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가 본격적인 동원이 이루어졌던 30년대 들어 변절하였다는 점은 더욱 시사적이다. 안병직 교수를 위시한 뉴라이트 세력의 상당수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미제와 결전을 벌일 수 있는 자주적인 통일강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NL(National Liberty : 민족자주) 및 주사파 출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과론적으로 남한이 더욱 강대국이 되자 미련 없이 김일성을 버리고 박정희로 방법론을 갈아탔을 뿐이다.

 이들이 건국절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일보에서 실시한 이영훈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승만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였기에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결과론적 사고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승만이 건설한 국가가 현재 위대한 것과 이승만이 건설한 국가가 위대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게다가 현재의 정부가 아무리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승만 정부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요컨대 건국절 이라는 명칭의 뒤에는 강한 국가에 대한 도착증적인 욕망 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뉴라이트 세력의 이론 속에서 친일 경력은 부국강병 및 실력양성을 위한 선각자의 솔선수범이 되며 분단국가 수립은 ‘위대한 경제발전이 운명 지워진’ 국가를 건설한 선견지명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민중의 희생과 사상의 실종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그렇기에 건국절에 대한 비판은 이들의 천박함과 성찰 없음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지 ‘친일파’ 라는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뉴라이트는 스탈린 시절에 살았다면 아내와 자식이 수용소에 끌려갔음에도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않던 몰로토프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좌파와 우파, 그리고 사람들의 희생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경제수치로 대변되는 전체의 성장만이 중요할 뿐이다.

 8월 15일 제 60주년 건국절에서 2MB 가 행한 연설은 2MB를 위시한 뉴라이트 세력의 사상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단결과 통합, 그리고 경제발전. 구질구질한 63년 전의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60년 전 이승만 각하가 들여온 가치들을 계승하자는 말 같은데, 63년 전의 물건이나 60년 전의 물건이나 낡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 친일/항일의 이분법적 구도와 천박하게 이해된 자유주의 및 국가주의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Posted by 데학생
시사IN/국제 in2008/08/05 21:20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상징적인 계기들로 작용할 것 같다. 이미 '세계의 굴뚝' 으로서 세계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확립한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단순한 경제 강국을 넘어선,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 조짐은 이미 다방면에서 나타다고 있다.

 물론 중국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비하면 초라한, 절반의 성공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홉스봄의 신간 <폭력의 시대> 에서 지적하다시피, 미국의 헤게모니는 그것이 소비에트에 비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 다른 강대국들의 양해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구미의 선진국들은 이미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에 대해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쪽의 악덕을 더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유럽연합은 푸틴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서 중국을 한시적으로 어느정도의 패권국가로 인정해줄 것이다. 그리고 중국 패권의 한계는 거기까지이다. 세력균형을 맞추기 위한 물질적 추 이상을 넘어선, 아편전쟁 이전의 정신적 종주국까지 자처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언감생심이다.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담론이 '역사의 종말' 까지 선언한 현재 세계에서 중화주의가 전 세계인들의 가치기준이 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이번주 시사 IN 에서 서술하고 있는 중국의 올림픽 준비 내용을 보고 있자면 중국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미국에 맞서 중화블록을 건설하는 헤게모니 투쟁보다는 자신들의 중화를 정복하였던 서구적 근대의 '힘' 만을 추구하기로 한 것 같다. 인권문제를 이유로 스필버그가 사퇴한 후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담당한 장예모가 '황후화' 에서 보여주었던 것은 중화의 인문이 아닌, 서구의 시선으로 본 봉건적 동양 판타지의 스펙터클 뿐이었다.  이것은 상징적이다.

 장예모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및 현대 중국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구화된 근대 상하이라는 대체적 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최소한 엄격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서구적인 것을 현재 속에서 드러내놓고 욕망할 수 없었으니-는 이제 국가가 주도하는 한편의 거대한 연극 속에서 그 가면을 벗는다. 서구화는 둘째 치더라도, 스터디움 건축을 위해 아무런 보상 없이 주민들을 철거시키는 그 무지막지함 속에 노골적인 힘에 대한 갈망이라는 중국 패권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평소 함축된 고사성어로 외교 정책을 암시하던 중화적 인문의 세련된과 섬세함은 아편전쟁의 설욕을 향한 세력 과시의 일념에 압살되고 말았다. 유럽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거대한 스케일의 건축물과 서구의 예술가들이 만든 대형 전시물 속에서는 '세계의 굴뚝' 만이 보일뿐 동아시아의 문화 공장을 담당했던 깊은 '중화' 는 찾아볼 수 가 없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세계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포섭할 수는 없다. 강대국이 되는 것과 선진국이 되는 것 사이에는 황하의 폭 만큼이나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문제는 국가의 잘못된 방향설정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중국의 지식인과 엘리트들 역시 강대국을 향한 정부의 국가주의 프로젝트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목록은 <쿵푸팬더> 의 눈색깔을 트집잡아 드림웍스에게 소송을 건 '예술가' 부터 중화제국을 찬양하는 '지식인' 까지 참 다양하다. 아마도 이들의 버라이어티 쇼는 아편전쟁 이후 서구에 굴복한 중화제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원하는 것은 '강한' 중국이지 '깊은' 중화 문화는 아니다. 후자는 전자를 상상하고 과시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중국이 알리앙스 프랑세즈와 괴테 문화원에 맞서 공자를 내세우는 것은 유교에 대한 경의와 자부심보다는, '세계적인 것' 에 대한 집착이라는 면이 더 클 것이다. 공자는 우연히 그 기준에 부합했을 뿐이다. 성화봉송 당시 티벳 독립 반대를 외치며 발광하던 중국 유학생들의 모습은 유교적 예(禮)와는 거리가 먼, 벌거벗은 중국 패권의 본 모습이다.

 동북공정과 백두산 잠식을 일삼는 중국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동북아시아에 일본과 러시아라는 또 다른 강대국들이 있고 미국이라는 균형추가 존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만행들이 동아시아에서도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누가 아는가? 중국과 미국이 21세기 버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혹시라도 모른다면 꼭 찾아보기 바란다. 이것이 제국의 실체다)이라도 맺을 수 있을지.

 중국은 위험하다. 미국과 같은 가식조차 존재하지 않는 노골적인 권력 그 자체이다(물론 이것이 네오콘의 중국 위협론과 궤를 같이 하여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중국과 외교적으로 많은 관련이 있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야욕에 대한 대응을 분명히 마련하여야 한다. 한국 역시 북한을 내부식민지로 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버려야 함은 당연지사이지만(금강산 관광을 '시혜' 로 보는 2MB 의 오만함을 상기하자).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세계패권을 향한 상징으로 이용하려는 중국과 국내의 여론을 돌리기 위한 용도로 이용하려는 2MB의, 서로 의식하지 못하는 밀월 아닌 밀월은 우려스럽다. 인문을 던져버린 벌거벗은 국가주의자들의 무의식적 상동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는 날부터, 우석훈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우려하였던, 문화가 거세된 노골적인 힘들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한국을 인문국가로 만들 수는 있으니, 패권적 야욕에 대한 지혜롭고 세련된 대응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무더운 여름에 피서삼아 베이징 올림픽을 즐기는 것은 좋다. 올림픽을 본다는 것 자체가 국가주의적 술책에 놀아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2MB가 원하는 불도저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문과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데학생
시사IN/사회 in2008/07/23 18:32
  조그만 바위섬 하나 때문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현재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2MB 정권의 각종 모략들이 민중의 삶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다소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할지도 모르는(천연가스? 어차피 채굴권은 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독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눈 뜨고 코를 베일 수는 없기에 우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를 대신하여 독도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걱정에 반응하듯 국회에서는 '대마도 특별법' 을 발의하고 '해병대 파병' 을 이야기하는 등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그 열기와 비장함만 보자면 마치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실지회복운동)라도 보는 기분이다. 그 열기가 생각할 수 있는 대뇌의 피질까지 모두 태워먹은 것 같아서 문제이긴 하지만. 감정적 반발에 기반한 저러한 '쇼' 는 독도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본 우익단체들이나 할 법한 발상을 의회가 앞장서서 법안의 형태로 내놓는 것을 보고 있자면 왜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된다.
 
  상당수의 시민들도 잘하는 것 없으니 정치에 대한 냉소부터 날리는 건 자제하자. 독도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물 안 개구리' 들의 총체적 문제이지 특정 집단의 두뇌 프로세스의 문제는 아니다. 하긴 앰네스티에 대해 법적 고발을 운운하는 경찰청장-세계제국 미국의 국무부 장관도 차라리 무시를 하면 했지, 앰네스티에 대해 법적 고발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게다-과 앰네스티가 UN 산하 기구가 아닌 NGO 라는 이유로 '편향된 운동권 단체' 쯤으로 생각하는 '촛불데모 반대' 시민들이 진치고 있는 사회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국제적 감각을 지닌 신중한 대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촛불정국에서 명성을 드높인 HID는 일본대사관 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지 사회의 평균적 수준에 뒤쳐진 부진아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일본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등은 무시하고 자정능력이 있는 시민들끼리 생각해보자. 일단 우리의 급선무는 머리에서 김을 빼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본질적으로는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봉고차에 확성기를 장착해 다니는 일본 우익 단체의 장단에 놀아날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공식적인 일을 추진하는 일본 정부는 중요한 순간에 우익 단체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며 연막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일본 우익 단체와 비슷한 형태로 민족주의적 분노를 표출하던 한국인들만 덩그러니 남아 우스워지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을 손 놓고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타깃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 정부에 대한 각종 규탄대회가 이어지고 모 대학 총학생회는 독도에 직접 방문하는 쇼까지 벌였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영토 내에서의 불만 표출로 움직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즉, 국내에서 2MB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촛불집회를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그렇다고 일본 원정투쟁을 계획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한국 내에서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은 반일감정으로 비화되어 일본 우익들만이 아닌,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에게까지 위기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내 여론을 악화시킬 위험까지 있다.
 
  우리가 국내에서 공격해야 할 것은 독도에 대한 공작을 펼치는 일본 정부가 아닌, 그 공작에 맥을 못 추고 있는 정부의 독도 대책 그 자체이다. 현재 정부든 의회든 시민이든 독도에 대한 대처방안은 일국적 시야 내에 갇혀있다. 우리들끼리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의지를 다지고 사실을 재확인하는 궐기대회를 하면 독도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국제사회에서의 치열한 로비와 홍보를 통해 자국의 역사관을 확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의 표면적 모습, 즉 일본 우익들의 난동에만 주목하여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대내적 홍보에만 주력하였고(그리고 2MB 본인은 사업가 시절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 유력 정치인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 같다) 시민들 역시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 이라는 장밋빛 환상 속에서 주기적으로 궐기대회를 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아마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기는 데에 한국 정부가 그렇게 정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일본이 행한 국제적 홍보 덕택에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테니. 그렇지만 아직 독도에 대한 좋은 자료들은 많이 남아있다. 역사는 해석의 싸움인 만큼 기존의 자료들을 최대한 꼼꼼하게 검토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제 3자가 처음 듣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정부의 합리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것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우리의 논리를 만들어 해외에 널리 홍보하는 일이다. 단순히 한국인들끼리 모여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라는 자위에 그쳐서는 독도를 지킬 수가 없다.
 
  급격한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공세는 '국제호구' 2MB 라는 호재를 만나 독도 문제 외의 문제들까지 제기하며 전방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사안이 터질 때마다 단순히 일본을 규탄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인 반일감정을 되살려 우리 내부의 증오의 에너지만 강화시킬 뿐 아무런 실제적 효과도 내지 못한다. 아니 그것이 또 일본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막장의 나선을 걷게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든 이상적으로든 우리는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현재 일본정부가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문제지만, 일본 내의 양심세력들과 우경화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과의 연대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가능하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우경화 된 것은 일본 시민들이 뽑아준 것이기 때문에 일본 시민들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2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시민들보다는 믿을 만할 것이다. 일본과의 장기적 관계까지 고려한다면 독도에 대한 대응은 더 이상 일면적인 틀에 갇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독도에 대한 대응은 그것대로의 전장을 분리하고-아마 역사학계와 국제정치 무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그 외의 영역에서는 그것들 나름대로의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아마 2MB는 대일관계에 있어서 실용적 태도를 취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그는 독도 외의 영역에 대한 친선유지를 위해 일본의 우경화마저 싸잡아 '친선' 의 이름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등장하여 공화국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내며 전 국민적 열광을 끌어내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히틀러이다. 대내적 정책실패와 대내적 외교실패로 외통수의 처지에 놓인 2MB의 구원은 과연 마술적 지도자에게서 나올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에게서 나올 것인가.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총체적 난국 속에서 매우 강한 강도로 터져 나온 독도문제는 앞으로의 시민사회의 흐름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평화적으로 독도를 지켜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역사의 전장' 을 선택할 것인지, 무력충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의 원초적 반일감정의 폭발을 선택할 것인지는 모두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프레시안 게재

p.s. 독도 문제를 떠나서 시사IN 이번호(45호)는 꼭 사서 보기 바란다. 독도 문제 뿐만이 아닌, 다양한 충격과 공포의 기사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이 글도 시사IN 이번호를 보고 필받아서 급하게 쓴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7/21 16:37
사용자 삽입 이미지
 
7월 21일 오후 3시에 캡쳐한 싸이월드 메인 페이지 뉴스들이다. 굳이 강조표시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 캡쳐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몹쓸 외국인' '동남아男' '日규탄' 등의 자극적 어휘로 표현된 각각의 기사들은 하나의 말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내셔널리즘.

기사를 하나씩 살펴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교인지라 보자마자 시껍해서 기사를 클릭하니 합성으로 믿고 싶어지는 이미지가 나를 맞이하였다. '대마도' '독도의 날' '침략주의' 등 별로 근거는 없는 가치판단적 어휘들이 나열된 피켓을 들고 확성기까지 준비해온 저 사람들을 보라!

 사실 나로서는 독도에 대해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제정치학적인 문제에 대해 거창한 '역사' 를 들먹이며-아마 자신들이 아는 '역사' 대로 영토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순진한 발상에서 나온 생각일 것 같은데, 근대 국가의 영토가 어디 '역사' 대로 정해졌는가? 아니 그 '역사' 라는 것 자체가 하나만 존재 가능한 것인가?- 민족주의적 감정을 불태워봐짜 남는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독도문제에 대해서 본 글 중에 가장 합리적인 글은 다음의 2개였다.

쇠고기, 금강산 그리고 독도
꽉 막힌 독도 문제, 확 뚫을 방법은?

 아, 그리고 고대 총학은 아예 독도를 갔다고 한다. 올해 정기 연고전은 아예 독도에서 개최해도 좋을 것 같다.

 기륭전자와 홈에버 투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총학생회라는 것들이 저러고 있으니 참 걱정이다. 아예 학생 복지에만 신경쓸게 아니고 사회적 목소리를 낼 것이라면 실제적으로 의미도 있고 효과가 있는 쪽으로 내야 할 것이 아닌가. 저런 짓 할꺼면 그냥 학내 청소나 해라.
쪽팔려 죽겠다.

 다음은 자그마치 '몹쓸 외국인' 과 '동남아男' 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플들이다. 기사의 내용인즉슨 불법체류자가 약을 이용하여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과 동남아 남자들이 한국인 정신지체 여성을 강간하고 결혼하여 영주권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기사 내용보다는 베플이 더욱 살펴볼 가치가 있으니 감상해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무섭다. 내 기억으로는 유영철 사건에 대해서는 '한국인' 을 들먹이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나 이주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그 범죄는 그들의 일반적인 '민족성' 을 대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동남아인' 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나라에서 허구한날 섹스관광을 즐기는 한국인들은 발정난 민족으로 보일게다.

 외국인이라고 욕할 것 없다.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경제발전 단계가 낮아 전근대적 요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국가 혹은 계급들의 일반적 특성이니까. 빅토리아 시대 영국 부르주아들은 SM 클럽을 애용하였고 파리의 노동자들은 창녀와 뒹굴었다. 아, 그러고보니 한국도 미아리가 있다. 현재도 한국의 블루칼라들은 도우미 노래방을 매우 애용한다. 그리고 화이트칼라는 룸살롱. 해소하는 방법이 '합법적' 이냐 '불법적' 이냐의 차이이지 근본적인 발정난 심리는 동일하니 괜히 같잖게 민족성이네 근성이네 운운하지 말고 성평등 의식 확산에나 노력하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는 저 리플들에서 '불법체류자' 를 '미군' 으로 바꾸어도 팩트가 별로 바뀌는 건 없다. 불체자를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난리를 친다면 이어서 주한미군 철수투쟁이라도 할 것인가? 이건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교양의 문제이다. '불쌍한' 불법체류자들과 성폭행범은 서로 배타적인 요소가 아니다. 상기하자. 가정에서 폭군이였던 유신세대의 가부장적 아버지들은 모두 고된 노동을 하던, 국가의 착취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이 모두 '악마' 는 아니었고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운동을 하였듯, 이주노동자들 역시 젠더적 관점이 결여되었을 뿐 그 자체가 총체적 악의 인격체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적 관점을 망각한 내셔널리즘의 광기는 한국인 혹은 백인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은 헤픈 여자-아마 백인과 '놀아나는' 여성에 대한 비난은 상당부분이 제국의 시민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일 것이다-로 만들며 유색인종에게 강간당한 여성은 순식간에 '민족의 순결한 누이' 로 탈바꿈시킨다. 전자는 꼬리를 먼저 친 것이 되지만 후자는 우리 민족의 착한 심성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제노포비아적 경향이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것의 반증이리라. KKK 단은 노예가 노동자가 된 후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 남부의 반란. 수정의 밤은 초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붕괴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란. 세계 어느곳의 역사를 보더라도 삶이 피폐해질 수록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타자에게 가상의 악마를 투사하여 그들을 공격한다. 특히 즉자적 계급의식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한국에서 타자는 필연적으로 '국민' 이 아닌 존재에 투사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만 명심하자. 우리가 유색인종을 보는 시선은 바로 백인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다.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 제국의 시대에 누렁이들이 좋아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누런피부 하얀가면의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현실 도피일 뿐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환상 밖의 현실에서 히틀러는 다시 웃고 있을 것이다.

p.s. 여성에 대한 시선도 매우 우려되는 만큼 이것은 현재의 내셔널리즘과 엮어서 따로 글을 쓸 것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7/17 19:00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이어 정권마다 반복되던 독도 문제가 곧바로 불거져 나왔다. "2MB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독도 괴담'을 방불케 하는 <요미우리>의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사안 자체의 심각성은 독도 문제를 금세 여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또, 대북문제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정부는 이번만큼은 '건수'를 잡은 듯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독도 괴담'의 주인공인 만큼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 꽤나 가상하다. 하지만 역시 '2MB'는 역시 '2MB'다.
 
  청와대는 <요미우리>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내분을 획책한다며 비난했다. 동시에 독도 문제로 맹공을 퍼붓는 야당에 대해서도 '자국 정부보다 일본의 우파 신문을 믿고 대통령을 공격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국민보다 극우 언론을 믿는 정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2MB를 제외하곤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같은 날 나온 다른 보도를 보자. 2MB 대통령은 지난 15일 부산시 업무보고 및 부산 발전전략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우(內憂)는 하나가 돼 극복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초점을 잠시 '공화국 북반부'로 돌려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 정부와 언론의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지도부와 인민을 분열시키려는 음해공작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북한의 식량위기는 미제의 고립 압살 책동 때문이니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전 인민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에 핵 문제를 제기하는 남한의 '동족'에 대해서는 모두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하고 있다.
 
  극적인 비교를 위해 다소 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다. 외부의 적과 어려운 환경을 설정하고 그것을 빌미로 내부의 총화단결을 호소(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하는 수법은 나치 이래로 전체주의 세력들의 고전적 수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아군'의 악덕을 비판하는 내부 구성원들은 '적군'을 이롭게 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숙청 대상이 된다. 일본 재단의 자금을 지원받는 낙성대 연구소-노파심에서 말하자면 필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친일적'이기 때문에 매도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보다 일본 언론을 인용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민주당이 '국가의 반역자'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수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부터 반대세력에게 '반미 민족주의 진보'로 낙인찍힌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한 대일발언과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을 통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는 반대세력이 자신에게 붙인 딱지를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참여정부 때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사회 각 계급을 재편했고, 이에 따른 불만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다. '국익'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정치적 논란을 종결짓고, 잘못을 전가하는 보도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친일세력'으로 규정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 민족의 해체를 주장해 대표적 '친일세력'으로 인식되는 '뉴라이트' 세력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2MB 정권의 총화단결 호소는 참여정부가 자극한 민족주의 정서와 맥락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극한 민족주의 역시 '선진 국가'를 위한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2MB의 노골적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 포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2MB의 딜레마는 자신은 끝없이 국가주의를 강조하지만,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종족담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족주의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MB 정권은 국가주의를 향한 질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다.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해 신중한 대응을 주문-금강산 문제에 대한 쌍팔년도 식 발언을 보자면 특별히 성숙한 정세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념적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언론을 보라", "여야도 없고, 진보-보수도 없고 모두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는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안에다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이 노골적으로 총화단결을 호소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외치면서도 마치 외부의 적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것인 양 대내적 단결을 호소하는 것은 다소 형용 모순 같다. 과연 무엇을 위한 총화단결일까?
 
  이러한 모순된 국가주의 드라이브가 계속된다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두 얼굴이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MB 정권은 '우리 민족끼리' 에 대한 반명제로서의 친일, 친미적 보수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종족담론을 끌어들일 수 없다. 또 2MB 정권은 참여정부의 '황우석 현상' 같은 국가지도자와 민족의 구세주가 일치하는 통일된 내셔널리즘도 확보할 수 없다. 그렇지만 2MB의 대외정책 실패와 일본의 우경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 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2MB의 우군보다는 대항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촛불이 시작된 이래 '민주-반민주' 의 구도로 나타났던 대립구도가 10년을 더 후퇴해 '매국노-민족'의 구도로 전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구도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2MB 자신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당부분 위험한 조짐이 보인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도 관광 붐이 일어나고, 독도 관련 영화가 개봉되고, 독도 관련 법안들이 무더기로 발의되는 '독도 마케팅'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촛불시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막연하게 표출된 내셔널리즘은 독도라는 구체적 대상을 만나 본격적으로 발현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는 양자가 서로를 '반국가 세력', '매국노'로 규정하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양자를 포괄하는 내셔널리즘 자체의 상승작용을 유도하며, 이렇게 강화된 내셔널리즘으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립의 발단이 된 내우외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힌 대외정책의 막장은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호소된 총화단결의 끝은 계급지배의 강화로 귀결된, 레이거노믹스의 파탄이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아마 앞으로 2MB 정부가 무엇을 하든 그 태생적 한계와 특유의 촌스러움으로 인해 단결된 국민의 동원에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가 아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지배블록에 대한 도전연합의 저항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전선이 내셔널리즘 내에서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정부가 주권의 두 요소인 대외적 자율성-사실 2MB 정권 하에서는 이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과 대내적 수행력 모두를 상실하는 순간이며 대항세력마저 내용물이 다를 뿐 형태는 같기에 그 미래마저 기약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요구되는 자세는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외교문제를 빌미로 주제넘게 시민사회에 대해 윽박지르는 것을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인 외교에 충실하게 임하고, 시민들 역시 독도관광 따위의 쇼에 열광하기보다는 정부의 외교정책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2MB 외교정책의 문제점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그것을 방치한 건 우리들 자신이다. 사실 우리가 일장기를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 정부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는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독도 관광 한번으로 숭고를 체험하기에는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