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세상/사회2009/05/31 17:02




1.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를 학습시킨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맛본 대중은 권력의 기표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미끄러짐이 존재한다. 근대 일본에서 나타난 천황의 패전트를 분석한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에는 패전트에 대한 당시 대중의 반응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스펙터클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기표는 천황으로 수렴되지만 권력을 상상하는 방식이 각각 다른 것이다.

 2MB 가 국장이라는 화려한 패전트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한 권력의 기의와 대중이 읽어낸 권력의 기의 사이에는 탈구조주의적인 미끄러짐이 있다. 금요일의 시청과 연화관에서의 패전트는 매우 전형적이었으며 그만큼 대중도 전형적으로 반응하였다. 마치 메이지 천황의 순행(巡行)을 대하는 당시 대중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영결식은 국가의 규율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느낀 권력에 대한 느낌을 표출하는 장이었다. 이러한 패전트를 주관한 2MB 정부가 대중에게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결국 이 모든 패전트는 공식적으로는 정부의 주도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노무현의 패전트, 화려한 대통령 노무현의 패전트였다. 죽은 노무현은 영결식을 통해 순행을 실천하였고 대중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대중은 여기서 노무현의 존재를 새삼 느끼며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어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
 



2.
 유시민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2MB 는 네로 황제가 되기로 작심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의 만신(萬神)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배의 장소로 콜로세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콜로세움은 곧 2009년 서울의 거리이다.

 콜로세움 밖으로 나와 관중석의 귀족들을 공격하지 않는 한 노예에게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스파르타쿠스가 거리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3.
 촛불과 노무현에 대한 추모열기의 정체성을 이처럼 잘 대변해주는 사진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촛불과 노무현은 모두 태극기라는 기표로 용해 가능하다. 정상국가를 향한 중간계급의 허위적 열망과,  이에 대해 공권력을 투입하여 당신의 국가에 대한 기획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2MB 의 대립은 이 한장의 사진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싸움은 곧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싸움이다. 하지만 양자 중 어느쪽이 승리하더라도 희망은 찾기 힘들다. 중간계급이 꿈꾸는 정상국가는 정치적 수단에 의한 계급의 공존과 전략적 연대가 아닌, 도덕적 당위 혹은 중간계급의 안락한 환상에 기반한 몰계급적인 통합(곧 국가라는 기표로 모든 것을 용해시키는)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2MB 가 꿈꾸는 계급사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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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세상/사회2009/02/03 13:49

 최근 검거되어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연쇄살인범 강호순 씨의 사진 공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무성하다. 지난달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필두로 하여 여타 신문과 방송들은 국민의 알 권리 및 추가 제보 가능성, 경각심 고취라는 ‘공익’을 위해 강 씨의 사진을 공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진을 공개하였다.
 
 이들의 논리는 사회의 총이익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입장에 서있다. 형법에 대한 공리주의적 이론은 공공의 이익을 최대화 하는 기제로서의 형법에 의의를 둔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법 자체의 정당성 혹은 도덕성 보다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요소가 범죄자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 동안 재벌 총수들의 범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에 대하여 경제적 타격을 근거로 반대하였던 이들은 일관성 있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 씨의 사진 공개는 최소한 공리주의적 관점 내부에서는 타당하다. 설사 강 씨의 자녀들이 사진 공개로 인해 피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 손실은 몇 백만 국민들의 감정적 효용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공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공리주의적 입장과는 대비되는 전형적인 응보론(應報論), 그것도 적극적 응보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범죄자는 무릇 그가 행한 범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적극적 응보론은, 만약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처벌로 인한 이익보다 크다면 범죄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자로는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를 들 수 있다.
 
 칸트는 고대의 탈리오법(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며 범죄자에게 정확히 그가 행한 죄악만큼의 형을 가할 것을 주문한다. 즉,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최대한의 가혹한 처벌이 공공의 효용을 증진시킨다면 그것을 허용하는 반면, 칸트가 주장하는 응보론은 법은 곧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에 형벌은 정의의 원칙으로서 그가 행한 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공리주의와 응보론의 대립은 ‘효율’ 과 ‘정의’ 의 대립이다. 사실 엄격한 응보론적 입장에서 보자면 강 씨에 대한 사진 공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법철학에서 말하는 응보는 피를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닌, 절대적 도덕원리와 범죄자 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응보론은 범죄자의 주변인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것을 정당화 하지는 않는다.
 
 칸트가 주장하였던, ‘더도 덜도 말고’ 범죄자의 책임만큼의 형벌을 부과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심각한 기술적 문제가 있다. 범죄자의 죄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형법은 이에 대해 죄질과 형량 간의 절대적 대응이 아닌 상대적 대응을 택하고 있다. 예컨대, 2 만큼의 죄질을 가진 범죄에 대하여 2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닌(우선 특정 범죄가 2만큼의 죄질을 가졌다고 수치화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1 만큼의 죄질을 가진 범죄가 3만큼의 형벌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다면 2 만큼의 범죄에 대해서는 4만큼의 형벌을 내리는 식이다. 위의 수치는 예를 들기 위한 것인 만큼 실제 형법이 운영되는 것은 아무래도 기준이 다소 신축적이기 마련이다.
 
 이제 수학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개략적으로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범죄에 대하여 범죄자의 인성을 문제삼던 기존의 심리학적 접근을 반박하며 범죄의 사회성을 주장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악(惡)을 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사회적 집합의식의 외부에 있는 행위가 범죄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범죄를 규정하는 것은 절대적 도덕원리가 아니라 상대적 사회의식이다. 예컨대 현재 우리가 법과 제도로 이루어진 문명사회가 아닌 물리적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에서 살고 있다면 반듯한 외모와 화술로 피해자를 양산한 강호순의 살인행각은 천인공노할 악마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뛰어난 재능으로 사냥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 된다. 우리는 의태(擬態)로 사냥을 하는 사마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뒤르켐의 접근을 수용한다고 해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범죄에 대한 우리의 격렬한 감정이 어디에서 유래하는 가를 차분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을 뿐이다. 뒤르켐의 접근은 현대적 형법이론이 택한 죄질에 대한 상대적 판단마저도 썩 만족할만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살인은 나쁘다. 하지만 우리는 양민학살을 자행한 베트남 참전용사와 노근리 학살을 자행한 미군병사에 대해 각각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연쇄살인은 더욱 나쁘다. 하지만 우리는 여고생 7명을 살해한 것과 건장한 남성 7명을 살해한 것에 대해 동일하게 반응할까?
 
 절대적인 명제로 생각되는 ‘살인은 나쁘다’ 는 명제를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내셔널리즘과 젠더, 계급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개입하여 판단의 결과를 제각각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강 씨의 연쇄살인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건강한 도덕적 감성의 반응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잠시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흥분한 대중은 ‘당연하게’ 피의자의 인권박탈과 사형, 심지어 고문까지 주장하지만-법철학자 마틴 골딩은 정상적인 법철학 논리로는 가혹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천부인권은 주권자에게 양도할 수 없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공권력에 의해 박탈될 수 없으며(헌법 제 37조 2항 :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범죄에 대한 우리의 분노에는 절대적 정의의 원리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부분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대중은 응보론적 관점에서 피를 원하지만 정작 분노를 선동하는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적 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저 유명한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첫머리에는 온갖 신체훼손과 유혈이 난무하는, 루이 14세 암살미수범 다미엥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그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스펙터클(!)을 통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대중에게 재확인 시켰으며 대중은 이러한 잔인한 피의 유희로 정의가 살아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권선언 이전 시대의 프랑스보다 발전하였다고 자부한다면 분노 자체와 그 분노를 선동하는 권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2/04 23:27

 북녘 동포들의 인권을 위해 귀중한 달러까지 뿌려가며(인권을 위한 행동은 2MB 정권의 외화유출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불철주야 애쓰는 극우단체들의 철지난 삐라 살포 덕분에 반도가 시끌벅적하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단체들과의 육탄전까지 벌어졌으며 당시 스패너와 가스총까지 사용하여 삐라 살포를 강행한 극우단체들은 최재성 민주당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교동 DJ 자택 앞에서 삐라를 살포하는 등 그 활동반경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 ‘진정성’을 따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저들의 행위에서는 그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 북녘 동포들의 인권을 개선하기를 원한다면 좀 더 거시적이고 세련된 전략을 짜든가 직접 북한에 잠입하여 주민선동 및 주석궁에 대한 테러라도 자행할 일이다. 저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386 세대 운동권은 거시적 투쟁전략을 짜고 공장과 농촌에 잠입하였었다. 자칭 애국보수라면 최소한 친북좌파들의 정부전복투쟁보다는 훨씬 더 가열찬 실천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군인 서정갑까지 가세하여 뜬금없이 남한의 현직 국회의원의 이름을 북한에 알려주는 저들의 행태는 ‘북한 인권 개선’ 보다는 ‘악의 축 김정일과 그의 친구 김대중에 대한 전투본능 분출’ 을 진정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저러한 행위가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초등 논리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통탄할 일이지만.

 정부 관계자 및 여당은 이들은 애국적 동기에서 활동한 것이기에 이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어도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여 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상식적이고 민주적인 대응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아무리 조악하고 빈약할지라도 그것을 말할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엉터리 주장에 대한 강제적 입막음은 그것의 전면적 수용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렇지만 말할 자유와 행동할 자유는 별개의 문제이다.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행위에 대한 평가는 그 동기를 중시하는 심정윤리와 더불어 그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와 여당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자유주의의 시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의 몇 구절도 살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모든 개인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보호자인 사회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요컨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에는 공권력의 개입도 정당화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1. 과연 삐라를 살포하는 극우단체들은 책임윤리에 충실한가 2. 삐라를 살포하는 행위에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면 그들은 책임윤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하며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설정하지 않은 것 같다. 삐라살포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에 대해 ‘이것이 정상적인 남북관계’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들과 한통속인 저들의 행위는 책임윤리라는 개념 자체를 망각한 무책임한 자위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쟁이 발발한다면 자신들이 주석궁에 대해 자폭공격이라도 할 것인가? 혹은 남북관계 파탄으로 인해 개성공단이 철거된다면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해서 개성공단 입주자들에게 보상이라도 해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 자신들의 대답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저들의 행위를 묵과할 이유가 없다. 책임윤리에 충실하여 자신들의 인생과 목숨을 걸고 진지하게 추진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망각한  단순한 화풀이에 전 시민의 안전을 담보로 내걸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옳은 일이 아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간다. 저들의 행위가 다른 국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침은 명백하다. 자유주의의 샴쌍둥이인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소수 극우 집단의 전투본능 충족에 따른 효용의 합 보다는 대다수 시민의 남북관계 안정으로 얻는 불안 감소라는 효용이 합이 훨씬 커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명백하다. 이들의 발언의 자유는 보장해 주되, 다수의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동시에 ‘국익’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강제력 행사가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설령 저들의 삐라 살포가 진정성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심정윤리가 아닌 책임윤리의 영역이기도 하거니와 밀은 <자유론> 의 다른 구절에서 어린이와 같은 정신적 한정치산자들에 대한 자유의 규제를 정당하다고 선고하였다(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접적 행동에 대한 규제만을 말할 뿐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한 규제는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당수의 국민이 막힌 공론장에 답답함을 느껴 뛰쳐나온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던 정부가 소수 극우단체의 집단 자위에 대해서는 갑자기 선진 민주정부로 돌변하였다는 점이다. 촛불시위에 따른 해외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보다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한 불안심리가 훨씬 더 커 보임에도 말이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자세는 높이 사야 할 것이나 그 기준이 이중적인 데다가 진압대상과 대화대상의 선정이 뒤바뀌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실 저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남북관계를 대결구도로 몰아간 정부의 살벌한 분위기 조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평소 자신들과 어울리는 신문들의 광고면과 시청 앞 광장에서만 활동하던 분들이 어쩌다가 임진각까지 노구를 이끌고 나올 결심을 하였겠는가. 정부가 굳이 강제력을 쓰지 않고도 진심으로 저들을 설득하기를 원한다면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생각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1세기 전인 15세기 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비운의 종교개혁가 요하네스 후스의 화형식 현장에서 한 신실한 늙은 노파가 악마를 퇴치하려는 경건한 마음으로 화형대의 장작더미를 나르고 있다. 화형대에 묶여 있는 후스는 노파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참 순진한 성자(聖者)시구려”. 광신도들의 특성은 구체적 가치의 내용보다는 초월적인 단어 자체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순진한 성자' 들 역시 마찬가지로 신앙의 본질보다는 '교회' 혹은 '교리' 라는 껍데기에 목을 맨다. ‘우리 MB가 다 해주실 거야’ 아줌마에서부터 부산의 청년백수, 그리고 메말라가는 남북관계에 삐라라는 불쏘시개를 쑤셔 넣는 극우단체까지 아직 2MB 교황의 추종자들 중에는 순진한 성자들이 많아 보인다. 그들에게 전하는 예수의 한마디. “저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소망교회 신자들은 경건하게 아멘을 복창할지어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1/17 23:08



 안녕하세요, 근영양이 스크린에 데뷔를 하였을 때부터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어느 대학생입니다. 입시에 따른 비난들로 마음고생을 하였지만 꿋꿋이 학교생활과 연기를 멋지게 병행하고 있는 근영양에게 항상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근영양이 출연한 영화들도 다 보지 않은 불성실하고 게으른 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색한 편지를 쓰는 것은 다름이 아닌 근영양에게 쏟아지는 원색적 비난들 때문입니다. 이 광폭하고 거대한 익명의 악의 앞에서 자칫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선 근영양에게 최대한의 위로를 보냅니다. 제가 근영양에게 전해드리고 싶은 말은 근영양의 외조부께서는 결코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으셨으며 근영양의 선행에 따스한 감동을 받은 저와 같은 사람들도 많다는 점입니다. 다소 재미없고 딱딱한 편지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편지를 보는 다른 사람들이 근영양의 외조부님과 근영양의 선행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근영양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저는 근영양이 받고 있는 비난이 저에게 돌려진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들은 근영양의 외조부님이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을 빌미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남북이 서로의 정치체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벌인,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정초적(正初的) 전쟁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수많은 소중한 목숨들이 각자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사라져 갔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전쟁에서 남한과 북한은 모두 서로에게 폭력적이었으며 따라서 어느 진영에 가담했었느냐는 선악을 판단하는 손쉬운 잣대가 될 수 없음은 당연지사 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편견과는 달리 당시의 빨치산은 남한의 사회모순에 적극적 문제의식을 느끼고 대안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던 세력이었습니다. 아마 극우파 이승만 전 대통령 대신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근영양의 외조부님의 활동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서울대학교 총장으로까지 거론되었던 김태준 선생이 빨치산 활동을 펼치다가 총살을 당한 비극적 역사 뒤에는 당시 미군정의 노골적인 좌익 탄압에 맞서 혁명적 지식인들이 빨치산이라는 고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습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국가를 위한 그들의 열망 자체는 국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전쟁의 와중에 사라져간 목숨들과 전쟁으로부터 파생된,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목숨들은 단순한 이념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굳이 해석학과 같은 복잡한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조정래 씨의 소설 <태백산맥> 은 이 당시의 정국을 바라보는 법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폭풍전야의 정국 속에서 청교도적인 엄격함을 고수하는 빨치산 염상진과 민족의 독립을 합리적 자세로 고민하는 김범우,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하섭 등의 갈등과 고뇌는 그 자체로 경탄할 만한 인물상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마 근영양의 외조부께서 그토록 통일운동에 매진하셨던 것은 저들이 말한 ‘전라도 빨갱이’ 의 피가 아닌, 외조부께서 믿으셨던 인간해방의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이 그분을 이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격동의 역사가 지나간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태백산맥> 의 등장인물들의 사상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역시 근영양의 외조부 역시 완벽하게 정확한 운동만을 하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산화해간 군인들과 그들에 대항하였던 빨치산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열망-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통일국가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았으며 그것을 추구했던 사람들 역시 실천 방법을 떠나서 최대한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통일운동의 방법론에는 이견이 있지만 모든 탄압을 받으면서도 한 평생 꿋꿋한 길을 걸으셨던 근영양의 외조부님에 대한 존경의 념을 보냅니다.

 우리가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염상진은 틀렸고 김범우가 옳았어’ 식의 교훈이 아닌, 모두가 각자의 동기를 가지고 참여하는 위대하고 격렬한 역사에 대해 최대한의 존경심과 배려심을 가지고 보는 자세이며 근영양의 외조부님 역시 근영양에게 교조적인 사회주의 이념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향한 삶의 자세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근영양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펼칠 수 있으며 부모님 역시 근영양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전해주시려 노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행을 펼치는 근영양은 이미 외조부님이 살아가셨던 삶의 목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근영양의 선행을 필요로 하는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근영양의 웃음과 선행은 영혼없는 세상의 영혼이요, 눈물 없는 세상의 눈물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근영양에게 외조부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비난을 하는 것은 스스로가 영혼과 눈물이 없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는 동물은 외부의 반응에 대해 즉각적이고 한정적인 대응밖에 할 줄 모르지만 인간만은 자신의 반응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치고 그 이미지가 다시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 줄 생각하여 대응을 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근영양의 선행에 대해 전라도, 빨치산, 통일운동 등의 어휘만을 보고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견공(犬公)들에 대해서는 하루 빨리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도 근영양이 밝고 열심히, 그리고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잊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근영양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마 근영양에게 비난을 퍼붓는 미성숙한 사람들보다는 근영양에게서 희망을 얻고 말없이 근영양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근영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비난들이 그치고 근영양이 계속 그 아름다운 빛을 이 우울한 사회의 곳곳에 환하게 비추어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어느 주책없는 늙은 대학생 팬이-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0/19 00:11

 지난 5월부터 7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촛불은 거리를 가득 메꾸었고 이는 한국 시민운동사에 거대한 이정표로 남았다. 하지만 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터져나온 촛불의 열정을 받아 지속적인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국가에 왼손을 새겨넣을 수 있는 제도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촛불은 쏟아지는 장마에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촛불의 열기에 대한 2MB 정부 및 반동 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이 가해지는 지금, 촛불 2기가 출범하였다.

 "한국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촛불이라는 유령이. 2MB과 강만수, 조중동과 강부자 등 한국의 모든 반동 세력들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얻을 것이 많은 대신(그것이 전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잃을 것도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촛불 2기의 미래는 다소 비관적으로 보인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종로에서 공부를 하다가 밖이 시끄럽길래 상황을 확인하고 잠시 교보문고에 들린 후 집회를 지켜보았다.


깃발들이 많이 있지만 일반 시민들의 수도 생각보다 많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모여서 놀랐다. 물론 예전의 촛불을 생각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이미 거의 끝장을 본 촛불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기륭전자 노동자 분과 촛불정국때의 일을 빌미로 면허를 박탈당한 운전자 분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런데 무대를 보니 예전과는 다른 구호가 적혀있었다. '뉴라이트 해체하자!!' '대안 교과서 찢어버리자!!'. 2MB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직접적 비판 보다는 그 이데올로그인 뉴라이트를 타겟을 삼은 듯 하다. 곧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라는, 예전 촛불정국 때부터 활동했던 단체의 회원이 나와 민족을 위해 일한, 자그마치 안중근 '장군' (이 분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는 당시 일본의 지배적 이념이였던 '아시아주의' 를 더렵혔다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과  윤봉길 의사가 어떻게 '테러리스트' 가 될 수 있냐고 열변을 토하였다.(알카에다도 다 자기 민족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그러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가치판단어가 아니라 서술적 용어이다. 독립군 활동을 한 안중근은 주 활동이 테러가 아니였으므로 테러리스트로 분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윤봉길은 테러리스트 맞다. 명심할 점은 테러는 전략적 수단이지 절대악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역사교사의 뉴라이트 규탄이 이어진 후 사회자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를 찢은 후 화형에 처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이영훈과 안병직 교수의 논문을 태웠다면 모를까, 정치적 의도로 서술된 대안교과서를 태우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하지 않겠다. 하지만 뉴라이트에 대한 규탄은 분명 과잉 민족주의적이다. '친일 매국노' 라는 쌍팔년도 레토릭을 아직까지 고수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고, 공감 역시 전혀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에 환호하였다. 지식인의 비틀린 근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 뉴라이트는 힘에 대한 추구로 인해 비판받을 대상이지 '친일적' 이기 때문에 비판받을 대상은 아니다. 엄밀한 논의 없이 과도한 민족주의적 레토릭으로 뉴라이트를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브루스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지적했다시피 한국은 기형적일 정도로 민족주의에 경도된 국가이기 때문에 뉴라이트는 당분간 일종의 사회악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만약 2기 촛불의 주최측이 의도적 전략으로 뉴라이트를 타겟으로 삼았다면 헤게모니 투쟁의 대상은 적절하게 선택한 것 같다. 물론 그 투쟁은 이론적 엄밀성 보다는 대중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여 동원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뉴라이트의 역공세에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될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의 늪으로 빠지는 셈이다.

 만약 촛불 2기가 덜떨어진 민족주의자들의 열정에 끌려간다면 촛불의 미래 역시 암울할 것이다. 이렇게 갈 것이라면 차라리 끝내는 것이 낫다. 시민의 촛불이 민족의 촛불, 국가의 촛불이 되는 순간부터 촛불은 완전히 노무현의 신화로 후퇴한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10/06 17:52
  제임스 딘, 커트 코베인과 같이 한창 타오를 시기에 생을 마감하는 스타들은 영원한 전설로 집단의 기억에 각인된다. 특히나 그것이 자살에 의한 것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버리는 자살의 결과 자체는 묘한 비장미까지 풍기며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스타의 자살은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아마 스타의 자살이 집단의 기억을 뛰어넘어 법이라는 성문화된 영역에까지 이름을 남기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이다. 최진실 씨의 죽음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나라당은 '사이버 모욕죄' 와 '인터넷 실명제'가 골자를 이루는 일명 '최진실법'을 신설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전여옥 의원과 홍준표 원내대표는 필봉을 휘두르며 진두지휘에 나섰다. 일방적인 마녀사냥 등 인터넷의 폐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시점에서 피해를 입은 개인을 신속하게 구제할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들의 문제제기 자체는 어느 정도 경청할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시민의 대표가 사회의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법에 제정에 있어서 연예인의 팬클럽과 같은 자세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최진실 씨의 죽음을 무작정 악플의 탓으로 몰아가며 푸닥거리를 벌이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엄밀한 사회과학 방법론(위대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무릇 인과관계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자의적으로 설정한 관계라고 지적했다)에 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법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엄밀성과 심사숙고가 요구되지만 '악플 때문에 최진실이 죽었다' 는 식의, 가십에 가까운 논거를 들며 법의 신설을 주장하는 것은 집권여당으로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미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촛불시위로 한바탕 홍역을 앓은 지난 7월 22일 '사이버 모욕죄 신설' 의 화두를 던졌고 현재 '최진실법' 으로 논의되는 내용들이 저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나라당은 최진실 씨의 죽음을 빌미로 삼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촛불정국 당시 '광우병 괴담' 에 대한 비난이나 현재의 '악플러' 들에 대한 비난이 모두 그 내용과 대책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죽은 자의 이름을 자신들의 정략을 위해 동원하고, 시민을 향한 칼에 전 시민에게 사랑받던 스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야 말로 정말 비겁한 태도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낙서를 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법전에 낙서를 하는 것보다는 화장실 벽에 낙서를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피해가 적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은 부당한 모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국가로부터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비단 인터넷 공간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상의 모욕에 대해 국가가 감시를 하겠다는 한나라당의 접근 방식-인터넷에 대하여 국가가 나서서 검열을 하는 대표적인 국가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이 있다-은 '모욕' 이 아닌 '인터넷' 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모욕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따진다면 한나라당은 촛불시위에 나왔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배상을 해주기 위해 다시 천막당사로 돌아가야 할 것이며 조선일보는 최장집 교수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배상을 해주기 위해 사옥을 팔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선동한 것은 루소와 볼테르의 세련된 계몽주의 이념이 아닌, 익명의 화가들이 그린 정치적 포르노였다. 이것은 분명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에 대한 모독이지만 그만큼 당시 구체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민중의 울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가들을 고소하며 탄압을 휘두르던 부르봉 왕조의 말로는 이미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귀를 막거나 상대의 입을 막아서 비난을 잠재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하여 소리없는 불만이 임계치를 넘었을 때 폭발하고야 만다.
 
  인터넷을 통제한다고 하여 '악플' 의 형태로 표출되었던 감정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프라인 상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항상 이성적이고 고운 말만이 오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전경들이 술집을 돌아다니며 술자리에서 욕하는 사람을 일일이 경찰서에 잡아넣는 것이 우습듯이 인터넷상의 악플에 대해서도 신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이 직접 나서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악플러를 체포해놓고 보니 대학교수를 포함한 전문직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뉴스가 말해주듯 악플은 한나라당이 생각하듯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열성분자' 들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거대한 일반적 증오의 일면에 불과하다.
 
  모두가 모두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보지 않았을 때 소외와 증오가 발생하고 그것은 악플, 욕설, 심지어는 최근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듯 무차별적인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소외와 증오이지 악플 자체가 아니다. 칼을 없앤다고 살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악플의 피해자를 줄이고 싶다면 힘써야 할 것은 악플에 대한 통제가 아닌, 정제된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과 함께 악플로 표출할 수밖에 없는 감정 및 공격적인 충동을 줄여주는 사회적 관계의 회복이다.
 
  한나라당이 단순히 대통령의 친위대를 넘어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책임 있는 집권 여당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들에 대한 비난에 감정적으로 발끈하여 강권을 휘두르는 것에 앞서 그렇게 밖에 울분을 표현할 길이 없는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프레시안> 에 게재됨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9/06 21:30
 오랜만에 대형 할인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수없이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지만, 문뜩 끝없이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물품들과 그것을 관리하는 수없는 종업원들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제복을 맞춰입은 종업원들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상품을 끊임없이 채워넣고 포장음식을 만들어낸다. 칠면조 바베큐가 진열대 가득 늘어져 있는 이러한 생산력은 무서운 것이다. 과연 자본주의 외의 체제로 이 놀라운 생산력의 유지가 가능할까?
 
 미국과 체제경쟁을 벌였던 스탈린이 그토록 공업화에 집착한 것은 전시체제 미국의 가공할만한 생산량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2차 대전 당시 스팸과 같은 '맛있는 음식' 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련군에 지원까지 하는 미국의 능력에 스탈린은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자본의 궁극적인 현실태는 노동이 아닌 상품이다. 무릇 상품이란 노동의 투입량 보다는 자본의 투입량에 의하여 그 공급과 수요가 정해지는 법이다. 노동의 투입량 역시 자본 투입량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안락함과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는 물질문명의 발달에 매진하여 왔고 그 결과는 대형 할인마트로 대변되는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 체제로 나타났다. 우리는 상품의 신상(神像)들이 늘어선 자본의 판테온(萬神殿) 한복판에서 신들이 가져다 줄 환상적인 미래의 법열에 든다. 물건이 너무나 많아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것은 수백수천의 신이 있던 카바 신전을 연상케 한다. 어떤 신을 믿어야 나에게 가장 큰 복락이 부어질 것인가. 그것만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태초에 있었던 신의 '말' 조차 꼬리표를 붙인채 대형 할인마트에서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세상이다.
 
 자동화 기술이 극도로 발전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생산력의 유지에는 필연적으로 기계화된(소외된) 인간의 노동이 투입되어야 하기에 현재의 물질문명 수준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 진정한 인간해방은 오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작게는 채식주의에서부터, 크게는 생태주의까지 이르는 모든 대안적 노력들은 물질문명에 대한 욕망 자체를 바꾸려는 기획을 추구한다. 하지만 미친 듯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 수레바퀴 속에서 질주를 멈추는 순간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의 수레바퀴는 그(또는 그녀)를 덥친다.
 
 상징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영세사업장의 물품은 '시장표' 가 되고 거대자본을 거부한 채 영세사업장을 활용하는 사람은 시장표를 쓰는 사람으로, 품위가 없는 사람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히게 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왜 피에르가르뎅 혹은 닥스의 정장과 넥타이를 해야만 하는가.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은 무책임하며 하이힐을 신지 않는 여성은 게으르다. 구두를 신지 않는 중년 남성은 말할 가치도 없다. 사회는 자본이 제공하는 '깔끔하고 세련된' 생활양식을 요구한다.
 
 사실 나부터가 자본주의적인, 혹은 물질적인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백화점에 진열된 기성품 옷들은 세련되었고 마트에서 파는 공산품들은 편리하다. 무엇보다도 고기는 맛있다. 나는 기술의 발전이라는 추상적 미래에 희망을 가장한 합리화를 배팅하고 있다. 생산력의 마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마술을 현실로 만들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마술은 SF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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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8 17:22

 그저께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가더니 어제는 간첩을 잡았다고 난리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10년 만에 간첩이 잡혔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축을 하는 분위기이다. 미안하지만 '좌파정부' 동안 간첩을 안잡은게 아니다. 기초적인 자료는 찾아보고 자축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번 정권 마칠때까지 '좌파정부' 들 보다 간첩을 많이 잡나 지켜보겠다.

 확실히 이 정권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세철 교수의 구속과 여간첩 사건은 분명히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인데(우연의 일치라기엔 발표 시점이 참 절묘하다), 아직도 간첩 타령을 하면 국민들이 색깔론에 놀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릇 간첩사건은 조용조용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첩사건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안보관을 고취' 시키는 것 외에 다른 효과가 있는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는 군의 명예 및 신뢰도와 직결된 문제인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도록 방치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만약 간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이제야 급하게 잡아들이고 국민들의 안보관이 진심으로 걱정되어 발표를 한 것이라면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김정일도 암살하지 못하고 간첩도 제대로 못잡는 한심한 정보기관에게 세금을 낭비하기가 아까울 지경이지만 이미 국정원은 그동안 조용히, 그리고 착실하게 간첩들을 잡아왔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갑자기 간첩을 잡았다고, 마치 지난 10년간 최초로 간첩을 잡은마냥 떠벌리는 것은(물론 기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기삿감이 될 만한 소재이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도대체 왜 그 많고 많은 주사파들은 놔두고 급진 PD인 오세철 교수를 잡아 가두었냐는 점이다. 아마 주사파는 쓸어도 별로 소득이 될게 없기 때문일까? 급진 PD에 용공색깔을 칠하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큰 수확이긴 하다. 노동운동을 확실히 쓸어버릴 빌미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2MB는 노사문제에 대해 '법대로' 대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학계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오세철 교수의 집안이 그렇게 짱짱하다고 한다. 사실 오세철 교수 본인의 경력만 보더라도 2MB 정부의 왠만한 장관들보다 훨씬 화려하다. 그만큼 2MB 로서는 오세철 교수를 잡아넣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큰 행위인데 이러한 짓을 감행했다는 것은 리스크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리스크를 능가할 정도의 수확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소리이다.

 만약 2MB가 생각하는 것이 후자라면, 그리고 이번 간첩 사건과 연계가 되어 있다면 정말 무서운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p.s. 그나저나 오늘 오랜만에 학교에 가봤는데 연세대 총학 이것들은 독도 문제 관련 대자보(총학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규탄시위 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를 아직도 붙여놓고 있다. 하긴 이 뇌용량 2MB 짜리들에게 오세철 교수 구속 규탄성명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과연 여기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지 지켜보겠다.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21 11:05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은 1871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패배 이후 프랑스의 철광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역사 역시 이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Posted by 데학생
내가 본 세상/사회2008/08/17 13:16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한반도 대운하 신문' 이라는 괴신문을 보게 되었다. 저 악명높은 프리존 뉴스나 뉴라이트 청년 웹진 바이트 등 온갖 저급 흑색언론(검은 셔츠단을 상기하자)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이번 것은 강도가 좀 더 강했다. '한반도 대운하 신문' 이라니!

-신문 홈페이지는 여기-
http://www.kgwoonha.com/

 특정 토목 사업을-추진여부도 확정되지 않은- 제호로 내걸고 그것만을 보도내용으로 삼는 신문이 유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아우토반 차이퉁', '후버 데일리 트리뷴' 이라고 하니 조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신문의 창간기사를 보니 한반도대운하 방송국도 운영한다고 한다. 물론 신문과 방송 둘 다 온라인 상에서만 활동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신문과 방송을 굳이 찾아서 보는 사람이 있을지 매우 의문스럽다. 차라리 변희재의 빅뉴스를 보겠다.

 여하튼 이런 괴상한 신문을 도대체 누가 창간하였나 궁금해서 스크롤을 쭉 내려보았다. 웹페이지에 명시된 바로는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와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이 주축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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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한반도대운하재단' 으로 검색을 해보니 버젓한 홈페이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빈곤한 각종 시민단체들도 홈페이지 혹은 카페를 운영하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던 차에 취업사이트에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검색어가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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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치 공기업이다. 궁금해서 검색을 더 해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정보를 보았다. 지난 4월 4일 한반도대운하 재단은 국토해양부 산하로 편제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대운하 국민운동이라는 관제운동을 펼쳐오던 김주성이라는 사람(위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대운하 신문의 발행인이다)이 이 재단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http://www.lifebokji.com/news/article.html?no=376)
 
 2MB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며 민영화에 신들린듯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우량 흑자기업인 인천공항마저 민영화를 한다고 하여 민영화의 기준에 대한 의문마저 일게 하였는데, 이제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국고는 한정되어 있기에(게다가 대책없는 감세로 인한 세수감소는 치명적이다)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선별적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2MB는 경제논리 대신 진영논리로 공기업 및 정부를 운영하려는 모양이다. 인천공항 대신 한반도대운하 재단이라니, 항공기에서 바지선으로의 퇴보이다.

 한국에서 토목공사와 관련된 이익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섭다. 이들에게 전체 사회의 복리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2MB는 한반도대운하라는 거창한 '떡밥' 을 던짐으로서 떡밥을 둘러싼 파장만으로도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생겨나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대운하 관통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업의 성황과 그에 이어 대운하 사업 홍보팀까지 모든 것은 돈으로 움직인다.

 관제운동이나 벌이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게 떡고물을 쥐어주고 괴벨스의 입으로 활용하는 것이 2MB가 말하는 작은 정부라면, 이 정부는 굳이 2MB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작은 정부가 될 것 같다. 도대체 이런 정부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저절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 신문과 재단은 만약 한반도대운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거나 완공된다면 무슨 일을 할까? 아마 전자의 경우에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일으키며 계속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며 연명을 할 것 같다(종말예언이 어긋난 교주의 운명이랄까). 그런데 대운하 완공후의 행보는 쉽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 아마 대운하에 띄운 12층 규모의 유람선에서 2MB를 모시고 풍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