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사회학2009/06/24 22:59

요약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반영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정치적 반영, 과도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 정책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같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집권 과정부터 집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정당정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퇴행시키며 스펙터클에 의한 동원참여를 이끌어 내는,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에 의존하였다.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욕망에 충실한 한국의 중간계급이며 이들은 노사모  · 촛불과 같은 동원참여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정치적 정서를 표출해왔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에서 나타나는 정서 역시 노무현의 실제 정책과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정치적 평가보다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동일시 대상의 죽음과 영결식의 패전트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참여는 반정치적 정서를 재생산하며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독으로 작용한다.


 이 글의 목적은 노무현 추모 열기라는 현상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나 단편적 분석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라는 통시적이고 거시적인 과정 내에 현상을 위치시키고 바라보는 데에 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이명박과 같은 개인의 가치관이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당정치 구조의 부실과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다. 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협애한 이념적 대립 축을 중심으로 갈등하는 정당체제는 인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며, 다원주의 없는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최장집, 2005).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어가던 시점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헤게모니와의 대면과 타협,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의 덫에 갇혔으며 사회적 갈등의 발현을 억압하는 통합이데올로기, 과도한 도덕주의, 민주적 가치와 위배되는 전문가주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도한 도덕주의를 내세운 정당개혁과 리더십의 문제는 오히려 정당과 시민의 연계 고리를 파괴하였으며, 헤게모니와의 타협과 통합이데올로기에의 포섭은 정당의 갈등축을 흐리게 하여 전반적인 정당구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최장집, 2006: 75-91).

 

이러한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선택하였던 방법은 정당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 즉 스펙터클을 통한 대중의 동원참여(박동진 외, 2006: 64)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웠던 정치적 스펙터클의 전형은 지역주의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경제적 갈등 축을 직접적 대변하고 돌파하기 보다는 초지일관 ‘지역주의 타파’를 제일의 정치적 동원기제로 활용하였고, 더 나아가 지역주의 문제를 참여정부의 정치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강병익, 2007a: 88). 하지만 지역주의 문제는 한국정치의 근본모순을 구성하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갈등축의 억압에서 기인한 종속변수일뿐더러, 이에 대처하는 노무현 정부의 방안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박상훈, 2005). 더욱이, 노무현 정부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제안한 정책들은 지역주의의 해소보다는 대부분 당시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각주:1]

 

정치외적 수단에 의한 정치는 진영이 명확하고 도덕적 열정을 추동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이끌어냄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열정적 동원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스펙터클의 구체적 결과가 체감되지 않을 시에는 오히려 참여자들에게 피로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줌으로써 냉소주의를 심화 · 확산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의 축을 재정의 하는 데에 대규모의 정치자원을 투입함으로써 사회의 근본모순을 규정하는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억압하고, 스펙터클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샤츠슈나이더, 2008). 이는 도덕적 열정에 의한 스펙터클에 대한 중간계급[각주:2]의 매혹,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대변하지 못하는 스펙터클에 대한 혐오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반하는 반(反)정치주의로 귀결된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는 지역주의나 탄핵 문제와 같은, 진영이 전국적 규모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하고 이에 대한 도덕적 열정을 동원하는 방식의 정치를 시행하였지만, 담론과 실제 정책의 내용은 괴리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에 의한 정치는 정치적 스펙터클의 강력한 동원자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반정치적인 경향으로 귀결되어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노무현이라는 현상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가 연출한 정치적 스펙터클을 도덕적 스펙터클로 받아들인 중간계급이다. 중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의 확대와 중간계급 의식을 반영하는, 철학과 가치관이 결여된 절충적 · 덕담 수준의 지속적인 ‘욕망의 정치’ 의 확대는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귀결을 방증하고 있다(강병익, 2007b).

 

촛불을 거쳐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드러난 일련의 흐름은 위와 같은 계급 편향적이면서도 보편담론을 표방하는 중간계급의 허위의식이자,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와 심정윤리만을 강조하는 반지성주의 및 반정치주의의 포괄적인 총체이다. 촛불은 환등상(phantasmagoria)으로 어른거리다 사라진 근대성의 그림자이자 거대한 스펙터클로서 도시의 중간계급을 유혹하는 욕망의 기제였다(이택광, 2009). 또한 유사과학과 괴담에 의해 추동되고 이론의 빈곤을 배태하고 있는 반정치주의와 탈정치화의 통로였다(백승욱, 2009). 촛불을 통해 나타난 흐름은 이른바 ‘촛불시민’ 이 다시 거리로 나온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노무현의 사회경제적 귀결에 대한 냉정한 이론적 고찰은 사라진 채 유시민 전 의원 류의 유사이론(유시민, 2005)에 의거하여 진중권 중앙대 교수,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와 같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규탄과 성토가 나타났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 라는 이름이 삼성경제연구소의 아이디어라는 점과 노무현과 이학수의 개인적 유착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고 있지 않다.[각주: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그가 생전에 동원하였던 지역주의, 개헌 등과 같은 스펙터클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얽힌 내러티브와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상징 및 이미지가 정치적 공간을 혁명적으로 재편한다. 이는 후보의 정강 대신 현직 의원의 기록에 투표하는 경향, 의사소통 기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미디어적 인물(media figure)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현상의 반영(마넹, 2004: 266-269)이다. 정당의 이합집산은 스펙터클이 될 수 없지만 정치인 개인의 죽음은 거대한 스펙터클이 된다. 이 시점에서 정치는 다시 스펙터클로 환원된다. 이명박 정부는 세심한 정책적 비판의 대상이 아닌, 선과 악의 결전이라는 스펙터클한 구도 속에서 타도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상정되며, 정치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영논리와 십자군적 열정에 의해 재배치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이러한 감정적 스펙터클이 물질적 패전트로 물화(Reification)됨으로써 스펙터클의 정점을 이루며, 그 동원효과를 극대화한다.

 

모든 패전트는 권력의 스펙터클을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권력의 기의(記意)를 학습시킨다. 하지만 권력의 기의는 패전트를 연출하는 현실권력의 의도대로 각인되지는 않으며, 대중이 패전트에서 경험하는 것은 현실권력의 ‘성격’ 이 아닌 권력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권력의 기의를 경험한 대중은 권력의 기표(記標)를 찾아 기의와 일치시킨다. 죽은 노무현은 일본 근대 초입, 메이지 천황이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랬듯 영결식을 통해 순행(巡行)을 실천하였고 시민에게 스스로를 내보였다. 시민들은 여기서 국가의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의 노무현의 삼위일체를 읽어내며 내면에 노무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무현은 내면의 도덕법칙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정치신념의 준거로서 환원된다(후지타니, 2004: 301-30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통상적 반응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분명 의사(擬似) 수호자주의이며 현실 정치의 원칙으로 삼기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달, 2006: 112-168, 301-30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이명박 전선’ 으로 결집된 정치권은 노무현 추모 열기를 정치적 자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노무현 추모 정국에 동참하는 대부분의 중간계급은 스펙터클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민’ 이라는 통합 이데올로기에 의한 진영재편은 배제되고 억압된 계급에 대한 동정과 멸시의 자세로 표출되며 이는 실질적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현대정치의 특징 중 하나인 욕망에 의한 정치에 대한 급격한 반동은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과도한 도덕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며[각주:4],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욕구의 반지성주의적 표출은 정부의 대내 자율성을 저해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파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보비오, 2007: 126-132).

 

정리하자면, 현재의 노무현 추모 정국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평가나 정책적 고려가 결여된 채 이루어지고 있는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자 반지성주의, 과도한 도덕주의, 의사 수호자주의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이명박의 좋은 아버지(buon padre)버전에 불과하다.[각주:5] 따라서 노무현에 대한 추모 열기는 결코 특별하고 위대한 도덕성의 표출이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의 연장선상에서 국면적으로 발현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갈등축을 폭력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사회의 진정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열정의 동원참여에 의한 최대강령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이성적 과정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기여를 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열망과 절망의 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더욱 깊게 재생산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파국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징후이다. 

 

참고문헌

 

강병익a,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의 리더십”,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창간호 pp.77-90

______b “철학도 실체도 없는 보수정치의 중도론”, 『미래공방』, 진보정치연구소, 2007년 5 ․ 6월호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 2004

달, 로버트(Robert A. Dahl),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 지성사, 2006

마넹, 버나드(Bernard Manin),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박동진 외, 『인터넷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박상훈,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2일자

백승욱,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보비오, 노르베르토(Norberto Bobbio),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2007

샤츠슈나이더.E.E.(Elmer Eric Schattschneider), 『절반의 인민주권』, 후마니타스, 2008

시사IN, ‘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2007년 11호

유시민, ‘나는 더 중요한 정치인 되고싶지 않다’,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6일자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

______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______ “촛불의 매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2009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______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연세대학교 시국토론회 발제문

  1.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이 도입하려고 하였던 전두환식 2인 중선거구제도는 지역주의 해결에 대한 노무현 정부 및 집권여당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중선거구제는 사실상 비례대표제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STV식(아일랜드에서 사용)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용하다 폐지한 SNTV식을 도입을 주장한 건데, SNTV식 중선거구제는 단순다수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보다도 못한 제도이다. 또한 비례대표제 역시 노무현의 주도가 아닌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스펙터클화하여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중선거구-이원행정부제 논의는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본문으로]
  2. 중간계급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이택광,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09869) 과 이택광, ‘다시 중간계급’(http://wallflower.egloos.com/1816737)를 참조. [본문으로]
  3.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서다가 좌초한 노무현이라는 신화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삼성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집권기간 전반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며, 삼성 X 파일 사건에 대해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가운데 도청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 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행태로 일관하였다(‘삼성은 참여정부 두뇌이자 스승이었다’, 시사IN, 11호). [본문으로]
  4. 흥미로운 점은 중간계급의 도덕주의는 청교도적 금욕주의 보다는 ‘욕망의 평등’ 에 대한, 분배적 정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계급의 정치적 휩쓸림은 이명박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던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편입 욕망이 좌절되자 욕망의 평등이라는, 즉 각개약진이 실패하자 일종의 연대전술을 취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연대는 그들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부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로 귀결된다. [본문으로]
  5. 어청수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기용되었으며, ‘명박산성’ 은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회의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행 집시법 역시 노무현 정부의 유산이다. 또한 임채진 검찰총장 역시 노무현이 두둔한 ‘삼성 장학금’ 검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무현에 대해 신화가 만들어지고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것은 유사역사가 가지는 판타지에 대한 매혹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데학생
투덜투덜2009/06/17 00:58

지난 18일 문광부의 한예종 종합감사 결과 통보와 연이은 황지우 총장의 사퇴로 인해 외부에 널리 알려진 한예종 사태는 날이 갈수록 대립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상식과 몰상식, 예술과 야만, 이성과 추악한 욕망 사이의 대립이자 한국 문화계의 향후 진로를 결정지을 만한 중대한 갈림길이다. 유인촌 장관은 이미 국립미술관장 해임 사건, 국립오페라단 해체 사건에 대한 대응에서 보여주었다시피 ‘잃어버린 10년’ 지우기에 혈안이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의 문화 발전과 예술진흥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야욕과 강박관념에 의한 것인지는 명백하다.

황지우 총장의 사퇴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소위 ‘한예종 죽이기’ 시나리오는 위와 같은 유인촌 장관의 독특한 문화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예종에 대한 전 방위적 공격이 문광부뿐만 아니라 공식 정부조직이 아닌 뉴라이트 세력과의 철저한 공조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미래포럼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작년부터 이미 한예종에 대한 공격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준비해왔으며 문광부의 감사 결과에 맞추어 꽹과리를 열심히 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행동방식은 흡사 서북청년단이나 나치 돌격대와 같은 유사정부조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일사분란하며, 오히려 문광부가 이들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돌격대와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광부는 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정부 외의 조직이라고 해서, 뉴라이트를 표방한다고 해서 한예종에 대한 이들의 고언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언’ 이 아닌 명백한 ‘망언’만을 일삼는다면, 그리고 권력의 비호에 힘입어 자신들의 몽상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규탄과 타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평소 한예종에 대한 이들의 공격내용과 지난 15일에 명동 포스트 타워에서 있었던 문화미래포럼의 심포지엄에서 나왔던 말들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이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예술교육을 제공하고 성과를 내고 있는 한예종에 고언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을 규탄한다.

첫째, 한예종 교수진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공격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언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자신들의 추측에 근거하여 한예종의 정치적 성향을 재단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닭이 우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좌파 교수’ 가 거슬린다면 지난 시국선언에 교수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학교를 찾아내 그곳부터 공격해야 할 것이다. 더 생산적인 방안으로는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 프리다 칼로, 브레히트, 네루다 등을 예술사에서 지워버리는 ‘예술사 바로잡기 작업’ 에 착수하는 쪽을 추천한다. 미래의 콩고물을 기다려야 하는 한예종 공격보다는 학술진흥재단에서 당장 연구자금을 지원받을 수도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쪽이 아무래도 합리적이지 않은가?

둘째, 이론교육 및 통섭교육에 대한 공격은 문광부와 문화미래포럼의 구성원들의 머릿속이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비어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주장이다. 근대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자연의 모사가 아닌, 작가의 독창적인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사상과 주관이 없는 기술에서는 복제 이상의 ‘예술’ 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아방가르드 없이 예술은 발전할 수 없다. 게다가 숭고한 예술의 차원이 아닌 세속의 비즈니스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이들의 무능은 명백히 드러난다.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에 의하면 현대 문화산업에서 예술품이 상품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미학이론과 담론이 필수적이다. 작품의 가격이 가장 높은 현대 작가 중 한 명인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실기 기술 때문에 가격이 높은가? 포르말린 속에 담겨 있는 동물의 사체를 비싼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론과 담론이다. 한예종을 공격하는 세력의 주장을 따른다면 우선 문화미래포럼에 소속된 교수들부터 학과를 폐지하고 의대에 가서 포르말린과 메스를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공립 대학은 부실하고 민영화만이 살길이라는 주장은 실증적 근거 없는 신앙에 가깝다. 모든 주장이 논파당한 후 고장난 라디오처럼 민영화의 주문만을 반복하여 외우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예종에 대한 모든 부당한 간섭과 공격을 중단하고 새로운 사립 예술대학을 설립해야 한다. 민영화가 만병통치약이라면 이들이 모여 만든 신생 대학이 곧 비효율적인 한예종을 압도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위대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시장에 뛰어드는 일만 남았다. 번거롭게 이미 비효율적인 관료체제와 좌파 교수들에게 포섭되어 있는 한예종을 개혁하기 보다는 뜻이 맞는 ‘전문가’ 들이 모여 새로운 사립 예술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빅뉴스>에서 무료로 대학 홍보를 해주고 ‘실크로드 포럼’ 에서 학생들도 공급해줄 것이다. 한국 예술교육의 발전을 위해 문화미래포럼 교수들은 당장 사직서를 쓰고 사학재단부터 만들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결국 이들의 한예종 공격은 합리적인 이론적 근거를 결여한 채 무지에서 나온 아집 혹은 콩고물에 대한 추악한 탐욕에 근거한 것이다. 유인촌 장관의 빈곤한 예술관, 정치적 야욕과 뉴라이트 세력의 물질적 욕망 혹은 근거 없는 몽상이 만나 현실에 구현되었을 때 펼쳐질 한국 문화계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에 비해 이들이 문제삼는 한예종은 예술을 사랑하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즐거운 배움의 터를 제공해주고 수많은 대외적 성과를 산출하는, 실력있고 아름다운 예술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을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대학생들과 연대하는 우리 진보신당 학생모임은 이 땅의 예술을 지키기 위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의 위대한 싸움에 동참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권력과 물질에 대한 추악한 욕망이, 척박한 땅에 이제 막 새싹을 틔운 순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나아갈 길을 정해야 한다. 예술이냐, 야만이냐. 우리는 함께 선언한다. 강풍은 꽃을 꺽을 수는 있지만 봄을 막을 수는 없다고. 이 길고 엄혹한 겨울 속에서 예술이라는 빛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은 모두가 함께 한발짝씩 나아갈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뒤틀린 역사의 미로 끝에서, 한예종은 모두와 함께 다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아르튀르 랭보
(Et a l'aurore, armes d'une ardente patience, nous entrerons aux splendides villes)


 

2009년 6월 17일
진보신당 학생모임
club.cyworld.com/newprogress

Posted by 데학생
투덜투덜2009/06/12 06:29
 최근 종강을 맞아 기말과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나절 과제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고 시청으로 나갔다. 작년보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역시 분노의 에너지는 슬픔보다 강한 모양이다- 그래도 올해 들어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최대로 모인 것 같다. 경찰측 추산으로는 5만명, 주최측 추산으로는 15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얼추 10만명 내외로 모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작년 촛불정국 당시와 비교하였을 때, 무난하게 모인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6월 10일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는 참여주체들이기는 하다. 촛불 때와는 달리 범야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87년 이후 최대도전연합이 정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겠다.
 하지만 상기해야 할 점은 87년도의 최대도전연합 형성은 박종철의 사망 자체로 터진 것이 아니라, 사망경위에 대한 은폐기도에 대한 분노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이한열의 현장에서의 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세는 87년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당시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도전연합을 포섭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지배블록과는 달리 현재의 지배블록은 딱히 도전연합을 포섭할만한 동기가 없다. 지배블록 내부의 분화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친박계가 민주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또한 예상대로 청와대는 야권에 대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동강령 역시 수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중도하차하게 만들 뾰족한 수단과 명분이 모두 없다는 점-아쉽게도, 2MB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상당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들까지 대표하여야 하는 체제이다-에서는 정국을 타개할 방법이 더욱 묘연하다. 국회에서의 탄핵소추 발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게다가, 설사 친박계의 초강수로 탄핵소추가 발의된다 하더라도, 이는 사법의 정치화를 뒤집은 정치의 사법화로의 역편향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이 정부를 하차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찰스 틸리의 지적대로 동원에서 성공적인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특히 중간계급 편향적인 운동의 속성을 고려한다면(어제 광장에 모인 상당수는 정장을 빼입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이 2MB 를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만들어내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리가 만무하다.
 2MB 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끌어내릴 수 없다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앞으로의 3년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문화과학」과 「한겨레 21」에서 이야기하는, 2MB가 파시즘 X 로 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버' 임에 분명하지만, 3년간 고민하고 대비해야 할 것은 2MB 이후이다. 2MB 다음으로 올 것은 박근혜의 보나파르티즘인가, 유시민의 보수적 민주주의인가, 제 3의 인물의 파시즘 X인가. 2MB 정부의 헤게모니 상실과 비효율적인 무리한 통치행위, 그리고 거리의 반정치적 정치 사이에 부재하는 정치를 회복할 길은 아직 멀어보인다. 역시 우리가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한 안티테제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이다. 6월 항쟁 22주년을 맞아 우리는 '독재 세력' 이라는 손쉬운 적이 아닌, 복잡하고 뒤틀린 역사의 미로 속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복잡한 문제다.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