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세상/국제2009/04/22 17:54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영향은 경제대국 일본 역시 피해가지 못하였고 그 결과는 ‘격차사회’ ‘워킹 푸어’ ‘상실의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침체된 경제사회적 현실로 나타났다. 노마 필드는 이러한 일본의 출구 없는 모순 속에서,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9년에 출판된 코바야시 타끼지의 소설 <게 공선>에 대한 젊은 층의 열광을 분석한다(<시평> 일본의 사회현실과 『게 공선』의 부활, 창작과 비평 통권 143호). 필드는 <게 공선> 붐의 원인을 단순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돌리는 것을 경계하며 그 붐 속에 나타나는 현대 일본사회의 의식을 읽어내고자 한다.
 
필드에 따르면 중년의 좌파들에게마저 도덕적 채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외면당하고 있던 타끼지를 부활시킨 것은 우연과 필연의 일치였다. 특히 우파 펑크록 밴드에서 노동운동가로 전향한 아마미야 카린은 <게 공선> 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단순한 상황인식 틀로서의 <게 공선> 에 대한 관심은 곧 사회변혁 및 연대에 대한 주장으로 전화한다. <게 공선> 이 일본사회에서 가지는 함의는 단순한 메타포를 뛰어넘으며 중년층의 반전운동과 청년층의 빈곤운동을 결합시키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눈앞에서 행해지는 야만적 착취에 대한 환기 및 즉자적 반발을 넘어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라는 구조 자체에 대한 대자적 저항을 주문하는 타끼지의 문제의식이 현재의 사회경제적 정세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드가 말한 대로 <게 공선> 붐이 표현하는 집단성과 행동주의에 대한 갈증이 노동의 필요성과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잘 사는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실질적인 성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요망된다. 얼마 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시사주간지 칼럼(시사IN 76호<보수파의 양심을 위하여>)에서 <게 공선> 의 부활과 일본 우파 학자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예로 들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에서의 대전환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향이 곧 파렴치한 거래의 자유에서 벗어난 시민적 결사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30년대의 세계 경제공황 당시에도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필두로 한, 기존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지만 그 귀결은 곧 파시즘이었다. 기타 잇키나 오타와 슈메이 등 당시 일본의 파시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물질에 기반을 둔 천박한 문명이라 비난하며 정신주의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디로든 튈 수 있는 공이라는 것이다. 구좌파와 신좌파, 신신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이념의 경계를 어려움 없이 넘나드는 아마미야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투영물을 발견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군상은 민주주의적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군국주의의 환상으로 치달은 미시마 유키오와 겹치며 사회주의 기관지 <전진> 의 편집장이었던 무솔리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내비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대자적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채 즉자적 저항의지만을 표출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은 노동자의 총파업 및 파시즘에 동시에 열광하였던 생디칼리스트 소렐의 모습에 가장 가까워보인다.
 
특히 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비참할 정도의 정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게 공선> 붐 이후의 상황전개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힘들게 만든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바다와 같은 인민의 일반의지와 국가를 직접 접촉시키려는 시도는 대개 데마고그에 의한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 의회 정치과정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수이익들의 갈등을 제도화 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 정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즉, 정치인이 그 지지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그 행위에 대해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가 필수적이지만 현대 일본 정치에서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의 불만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내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정치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억압된 갈등들은 노골적인 힘의 행사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시도는 용산참사와 같이 국지적으로 진압되거나 폭력혁명과 같은 거대한 피바다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저항의 움직임이 폭력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그것이 제도화 된 정치의 영역에서 대변되지 못한다면 저항세력이 요구하는 내용들은 실제 제도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오히려 깊은 실망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 사례로는 한국의 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한때 주최 측 추산으로 전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을 동원한 촛불시위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였으며 역으로 지배블록의 자신감만 키워준 채 시민들에게는 저항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만을 남겨놓았다. 필드의 글에서 묘사하는 일본사회에서는 <게 공선>을 둘러싼 직접 행동적 열망만을 읽어낼 수 있으며 좋은 정치와 제도에 대한 성찰은 읽어내기 힘들다. 정치가 부재하는 일본에서 지속적인 열정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시민간의 연대가 얼마나 국가의 모습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맑스의 말대로 역사는 반복되며 현재의 모든 운동은 과거의 상징을 빌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게 공선> 은 현재의 세대가 빌려오는 과거의 상징이다. 근대문학이 종언된 현재에서 진행되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시절의 상징을 빌려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고 보나파르트 역시 삼촌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듯이, <게 공선> 을 빌려온 세대가 만들어가는 운동은 <게 공선> 이 그려내는 시대의 운동보다 왜소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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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사회학2009/04/21 16:23

...국가는 이미 진정한 혈통관계로 맺어진 가족국가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시원을 단군으로 보는 시각은 이미 1898년에 관찰되며(「皇城新聞」, 9월 5일), 그리고 같은 신문의 1905년 사설 ‘國家思想論’에서는 국가를 “一致團結의 血性”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2월 16일). 이러한 시각은 이후 더욱 발전되고 넓게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국가관은「大韓每日申報」,「皇城新聞」그리고「西北學會月報」등지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어,「皇城新聞」의 1909년 4월 21일 사설은 단군을 “聖祖” 와 “國祖”로 지칭하여, 단군을 기원으로 한 가족국가관을 제시한다. 다른 예로 「西北學會月報」의 한 기사 “國家論의 槪要(續)”는 국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所謂 民族이라 云者 家의 集合體로 家에 家長이 有과如히 族에도 亦 族長이 宥야 家族이 家長을 崇拜야 此에 服從과 同一의 思想으로 以얏도다. 凡家族은 共同의 始祖로 一族의 長을 崇拜고 其 權에 服從며 族長은 凡家族의 長으로 族 全體를 統御는 地位에 立者라. 此 卽 血族團體라 稱 者라. 國家의 始原은 洋의 東西와 國의 文野를 不問고 可던지 一家一族의 制로 始하야 成고 特히 我邦이 最著야 或은 此를 稱하야 血族的 國家라 稱니…”

 

가족으로서의 국가, 혹은 가족국가는 보편적인, 따라서 자연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형식으로 도입되었으며, 이 개념을 통하여 구체적 민족주의 담론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국가관념 및 가족국가관과 함께 주목할 부분은 일본의 천조대신과 대응적으로 단군이 조선 민족의 조상으로 불리게 된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삿사 미츠아키(佐佐充昭, 2000; 2001)의 독창적 연구들은 어떻게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가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관해 잘 논증하고 있다.

 

천황의 지위와 권력은 메이지 이전 시대에는 단지 명목적인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를 통하여 단군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천황이 메이지 시기에 새로운 전통으로 “발명” 된 국가종교인 국가 신도의 상징적 중심이 되었듯이, 한국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일본의 전통종교에 비견할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민족 종교”인 단군교(대종교)는 1909년 나철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공포되었는데, 이 때 이들은 이 민족종교가 이미 수천년 전 창설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광”(重光)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채오병, "민족형식과 민족주의", 2007, 한국사회학 제 41집 4호

 이상의 내용은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후맥락을 설명하자면 조선의 초기 엘리트들은 이미 조선과는 달리 국민국가를 완성한 일본(제국)의 민족주의-국가주의에 강한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만의 민족주의를 만들지만 '민족' 과 '국민국가' 의 구성요소라는 프레임은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한다. 예컨대 F15 전투기를 만들기 싫어 라팔을 만들더라도 날개와 콕핏, 랜딩기어 등의 구성 요소들은 꼭 포함시키는 것이다(물론 모양은 다르지만). 논문에서는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반발, 헤게모니적 인각' 이라고 표현한다. 제국의 이념과 식민지의 이념이 이데올로기적인 내용물은 서로 반대되지만 더 큰 사고의 틀인 헤게모니적 차원에서는 양자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헤게모니적 인각이 가장 잘 나타난 사례가 바로 단군신화이다. 독일 국가학의 이론적 대부인 헤겔에 의하면 국가는 '자연적 측면'(탄생, 핏줄, 관습, 전통 등) 에 입각한 강제조직이다. 따라서 독일 국가학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자신들이 창조한 국민국가를 가족국가의 형태로 설정한다. 즉, 국민이 사회계약을 통하여 국가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혈통을 통해 국가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혈통의 정점은 바로 메이지 이후 새롭게 정치적 상징으로 부상한 천황이다. 메이지 이전까지는 일반 인민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거나 천황에 대해 민간신앙의 신들과 비슷한 희극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여신(천조대신)에 대한 신화도 보편적이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민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위한 도구로서 천황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천황으로 혈통이 이어지는 창조신 아마테라스 여신의 신화를 내세워 천황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위치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모든 일본인의 혈통적 시조로서의 천황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직접적 자연성에 바탕을 둔 인륜적 정신인 가족의 형태가 더 큰 인륜으로 확장되는 형태인 가족국가 모델에서 국가의 지배자는 계약을 통해 주권을 위임받은 에이전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질서를 통해 신에게 권위를 위임받은 가부장이 된다. 따라서 지배자로서의 천황은 국민에게 그 정당성을 승인받을 필요가 없으며 가부장의 권위를 통해 일본이라는 가정을 통치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국가 모델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어, 메이지 천황의 시찰 당시 사람들은 메이지 천황에게서 위엄있는 근대군주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의 시선까지 느꼈다. 이는 국민들의 충성심 진작과 국가의 통합에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제국 일본 및 서구 열강들의 이권침탈에 골머리를 썩히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통합된 가족국가 모델을 통해 강한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며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아마테라스 여신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신토(神道) 의례의 발명 및 국가적 장려와 같은 수단이 불가능하였으며, 역성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왕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혈통적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요컨대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고 황실이 유교전통에 매몰되지 않은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혈통적 권위를 종교적 차원에서 내세우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자신들이 조선인의 시조이자 혈통적 아버지라고 자처한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이씨왕조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일부 엘리트들은 국민통합의 수단으로서 이씨왕조를 버리고 새로운 상징을 발굴해낸다. 그것이 바로 단군이다. 단군은 이론상으로(?) 조선 민족의 혈통적 시조이기 때문에 가족국가의 구심점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단군민족' 이라는 경계설정이 가능해진다. 아마테라스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과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은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해질때 양자는 각자의 독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 1> 에서 보다시피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에 나타난 '민족적 의식' 의 대다수는 일본의 그것들과 일대일로 대응한다. 이는 이러한 '민족적 의식' 들이 그 당시에 민중들 사이에 이미 퍼져 있었다기 보다는 일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대응으로써 발명 혹은 발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앞에서 간략히 이야기했다시피 일본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의 가족국가 모델에서 그 형태를 차용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중등과정에서 배우는 윤리교과서에는 상당히 위험한 헤겔적인 가족국가관과 단군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당시 조선은 자신만이 단군의 직계 후계자라고 내세울만한 주체가 없었기에 일본의 천황제와 같이 혈통적 민족주의가 물화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통령 대신 왕검이 통치하는 입헌군주국이 되는 것은 면하였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민족의 화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민족주의의 광기를 동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울 독재자가 나타나기 어렵게 만든다. 2차 대전 당시 천황은 가부장의 권위에 호소하여 신민을 동원하였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붉은악마를 개인을 위해 동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위험성은 상존하는 법. 우리는 그 동안 중등교육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었던 '발명된 민족' 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는 시민적 연대를 통한 사회이지 혈통적 유대를 통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데학생
투덜투덜2009/04/18 21:05

 지난 2008년 2학기, 개강 첫 주의 화두는 단연 연고전이었다. <연세춘추>(이하 ‘춘추’) 역시 이에 발맞추어 9월 1일 발간된 1593호에서 연고전 특집을 보도기획으로 다루었다. 종목별로 경기방식, 주목할 선수, 전력분석, 전문가분석과 같은 4개의 세분화된 코너를 만들어  자세한 정보를 소개한 춘추는 이 외에도 연고전에 대한 많은 기사를 1594호 까지 2주 분량에 걸쳐 수록하였다. 연고전은 두 거대사학이 공식적으로 개최하는 행사이며, 응원단에서 개별 학우들까지 수많은 교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이기에 이에 대해 마땅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교내 언론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연고전을 보도하는 춘추의 태도는 합당한 정도의 관심을 표명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과열에 가까워 보인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종목별 심화분석은 정론지를 자처하는 교내언론이 특별기사로 내보낼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다. 팀의 전력 분석과 선수 개개인에 대한 분석, 전문가 평론까지 곁들인 보도기획은 평소 교내의 여러 목소리들에 관심을 보이고 공론장을 만들어주었던 춘추의 평소 행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오세철 교수 구속 등의 사건들 역시 다루고 있지만 ‘보도기획’ 이라는 이름하에 연고전이라는 하나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포츠로서의 연고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스포츠 연세’ 가 할 일이지 춘추가 할 일이 아니다.

 

 또한 1593 호의 기사 “연·고전에서의 진정한 승리” 는 연고전에 대한 과열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넘어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는 섬뜩함까지 풍긴다. 다음은 이 기사의 몇 구절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스포츠를 통하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일체감을 부여하고, 승리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한 것처럼, 연·고전은 연세의 이름으로 재학생, 동문, 교직원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축제의 장이다.”

 

“올해에도 연세의 지성들이 단단한 결집력으로 독수리처럼 지축을 박차고 높게 비상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일체감’ ‘자부심’ ‘긍지’ ‘모두가 하나’ ‘단단한 결집력’ 등의 어휘가 난무하는 기사는 스포츠가 시민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는 엘리트 스포츠가 아닌 대학생들의 건전한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한 주문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문제의식은 결코 스포츠의 사회적 맥락까지는 이르지 못하며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역시 기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문제는 ‘미완의 연고전’ 이 아니라 연고전 그 자체이다.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제국주의의 국민동원 프로그램과 그 연원이 맞닿아 있다. 물론 일반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생활 스포츠는 그 자체로 바람직한 기획이지만 공동체 통합의 목소리와 맞물리는 순간 섬뜩한 쇳소리를 낸다.

 

 기사의 후반부에서 바람직한 예로 제시하는 서구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격화되던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서구의 체육교육이 모델로 삼는 지덕체(智德體)가 합일된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기사에서 바람직한 통합의 기제로 간주하는 근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강한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에서 비롯된 행사에 불과하다. 통합을 강조하는 기사 첫머리에서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을 찬양하는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 를 촬영하였던 레니 리펜슈탈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1594호의 기사 “응원단,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는 언론의 사회적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자의 자질 향상이 필수적이라는 고전적 진리를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연세대의 상징인 파란색이 일본 응원단 ‘울트라 닛폰’ 의 응원가를 차용한 연세대의 응원가 ‘싸.이.고’  와 얽혀 일본을 연상케 한다는 기자의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빨간색이 위쪽, 파란색이 아래쪽에 있는 태극기는 한일전이 있을 때마다 일본을 발밑에 두자는 제국주의적 사상을 연상케 하는 문제 있는 국기인가? 차라리 기자가 문제 삼은 응원가 ‘싸.이.고’ 의 제목이 정한론(征韓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침공 시도까지 한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이름과 같다고 기사를 쓰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였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통합에 대해 수많은 뛰어난 연구결과를 남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그의 마지막 저작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에서 원시상태의 인류가 집단적으로 종교의례를 행하며 느끼는 집단적 열광의 경험이 사회를 하나로 묶게 된다고 보았다. “공통적인 관념을 공통적인 의례로 함께 옮긴다는 사실에 의해 결합되어진 사회“ 와 ”사회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이라는 뒤르켐의 언명은 집단적 체험이 집단의 결속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행하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그리고 뒤르켐에 따르면 종교적 체험이 기반이 된, 공통의 신념으로 묶인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에 기초한 사회는 개인의 의식이 집단의 의식에 귀속된,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이다. 뒤르켐이 말하는 집단적 열광의 경험과 연고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연고전이 학업에 지친 학우들에게 신성하고 흥분되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수행하는 긍정적 기능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혈적 공동체로의 통합기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폭력적 측면 역시 바라보아야 한다. 연고전이 자유로운 지성인들의 자유로운 결사를 촉진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연고전은 지성의 도피처에 가깝다. 저 위대한 트리어(Trier)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고전에 대한 열광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도피이다. 연고전은 곤궁한 신입생의 한숨이며, 무정한 대학생활의 감정이고, 또 영혼 없는 상아탑의 정신이다. 연고전은 학우들의 아편이다. 이것은 비단 연고전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는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되는 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대개의 경우 이질적 주체들을 타자화(他者化) 시키며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직시할 수 없게 만들기 마련이다.

 

 연고전에 대한 필자의 부정적 의견은 차치하더라도,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정론지는 모름지기 사회현상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공론들이 형성되는 것을 도와야지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려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성인들이 모여 있다는 상아탑의 언론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탈리아의 세계적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지식인은 단춧구멍에 꽂는 장미꽃이 아니라, 대중이 깨닫지 못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문제들을 들추어내는 것이 그 본연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세대의 학우들은 ‘연세인’ 이기 이전에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지닌 ‘대학생’ 이다. 역시 언론의 임무는 대중의 구미를 잘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편한 진실’ 을 상기시켜 줌으로서 독자들에게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을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연고전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소개하고, 연고전 시즌에 이루어진 오세철 교수의 구속에 대한 취재도 비교적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한 춘추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다소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교내의 유일한 학보로서 춘추의 위치와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비판은 필수적이다.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어 졌을 때 시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에 의도적으로 무게를 싣어주어야 한다. 이는 춘추의 보도방식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연고전이 연세대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성찰되어야 할 하나의 ‘현상’ 이라면, 그리고 허구적 통합의 열망이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수많은 열광의 함성에 묵살되지 않도록 무게를 싣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춘추가 적극적으로 연고전 반대 운동에 나서라는 주문이 아니라 목소리의 크기들을 조절해달라는 주문이다. 1594호의 “안티 무관심” 이라는 칼럼에서 올바르게 제기해준 문제의식을 춘추의 편집의도에도 반영하여야 춘추가 진정으로 지성인들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중앙언론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연세 언론비평> 에 게재

Posted by 데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