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에 따르면 중년의 좌파들에게마저 도덕적 채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외면당하고 있던 타끼지를 부활시킨 것은 우연과 필연의 일치였다. 특히 우파 펑크록 밴드에서 노동운동가로 전향한 아마미야 카린은 <게 공선> 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단순한 상황인식 틀로서의 <게 공선> 에 대한 관심은 곧 사회변혁 및 연대에 대한 주장으로 전화한다. <게 공선> 이 일본사회에서 가지는 함의는 단순한 메타포를 뛰어넘으며 중년층의 반전운동과 청년층의 빈곤운동을 결합시키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눈앞에서 행해지는 야만적 착취에 대한 환기 및 즉자적 반발을 넘어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라는 구조 자체에 대한 대자적 저항을 주문하는 타끼지의 문제의식이 현재의 사회경제적 정세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드가 말한 대로 <게 공선> 붐이 표현하는 집단성과 행동주의에 대한 갈증이 노동의 필요성과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잘 사는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실질적인 성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요망된다. 얼마 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시사주간지 칼럼(시사IN 76호<보수파의 양심을 위하여>)에서 <게 공선> 의 부활과 일본 우파 학자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예로 들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에서의 대전환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향이 곧 파렴치한 거래의 자유에서 벗어난 시민적 결사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30년대의 세계 경제공황 당시에도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필두로 한, 기존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지만 그 귀결은 곧 파시즘이었다. 기타 잇키나 오타와 슈메이 등 당시 일본의 파시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물질에 기반을 둔 천박한 문명이라 비난하며 정신주의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디로든 튈 수 있는 공이라는 것이다. 구좌파와 신좌파, 신신좌파,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이념의 경계를 어려움 없이 넘나드는 아마미야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투영물을 발견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군상은 민주주의적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군국주의의 환상으로 치달은 미시마 유키오와 겹치며 사회주의 기관지 <전진> 의 편집장이었던 무솔리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내비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대자적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채 즉자적 저항의지만을 표출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은 노동자의 총파업 및 파시즘에 동시에 열광하였던 생디칼리스트 소렐의 모습에 가장 가까워보인다.
특히 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비참할 정도의 정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게 공선> 붐 이후의 상황전개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힘들게 만든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바다와 같은 인민의 일반의지와 국가를 직접 접촉시키려는 시도는 대개 데마고그에 의한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 의회 정치과정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수이익들의 갈등을 제도화 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 정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즉, 정치인이 그 지지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그 행위에 대해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가 필수적이지만 현대 일본 정치에서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의 불만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내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정치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억압된 갈등들은 노골적인 힘의 행사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시도는 용산참사와 같이 국지적으로 진압되거나 폭력혁명과 같은 거대한 피바다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저항의 움직임이 폭력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그것이 제도화 된 정치의 영역에서 대변되지 못한다면 저항세력이 요구하는 내용들은 실제 제도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오히려 깊은 실망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 사례로는 한국의 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한때 주최 측 추산으로 전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을 동원한 촛불시위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였으며 역으로 지배블록의 자신감만 키워준 채 시민들에게는 저항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만을 남겨놓았다. 필드의 글에서 묘사하는 일본사회에서는 <게 공선>을 둘러싼 직접 행동적 열망만을 읽어낼 수 있으며 좋은 정치와 제도에 대한 성찰은 읽어내기 힘들다. 정치가 부재하는 일본에서 지속적인 열정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시민간의 연대가 얼마나 국가의 모습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맑스의 말대로 역사는 반복되며 현재의 모든 운동은 과거의 상징을 빌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게 공선> 은 현재의 세대가 빌려오는 과거의 상징이다. 근대문학이 종언된 현재에서 진행되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시절의 상징을 빌려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고 보나파르트 역시 삼촌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듯이, <게 공선> 을 빌려온 세대가 만들어가는 운동은 <게 공선> 이 그려내는 시대의 운동보다 왜소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