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시민직선에 의해 치루어진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근 3달간 들어왔던 촛불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이익집단 세력을 동원 가능한 공정택에 대항하여 이 정도로 '조직표' 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순전히 촛불의 힘이다. 하지만 이념지형 상에서의 극단적인 대비와 낮은 투표율이 말해주다시피 이번 선거는 이미 입장이 정해져 있던 사람들 중 자신의 편을 얼마나 많이 투표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던, 실질적으로 동원력의 싸움이였고 이 싸움에서 어쨌던간에 패배한 것 역시 현실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구별 득표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자.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서초, 강남, 송파로 대표되는 강남 8학군 라인의 공정택에 대한 몰표가 유독 눈에 띈다. 진보신당 송경원 연구원이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몰표현상이 공정택의 교육정책에 대한 진지한 유물론적 고찰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정택은 '강북 아이들이 강남으로 유입되지 못하게 하겠다' 는 공치사를 날리긴 하였지만 강북 학생이 강남으로 진학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이상(그리고 고교선택제는 정 반대의 제도이다) 이는 '부동산 규제는 하겠지만 집값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라는 공치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공정택을 '믿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급투표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송경원 연구원의 지적과는 달리, 이러한 믿음은 관념적 계급의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 투표는 철저히 계급투표이다. 즉, 자신의 유물론적 이익 보다는 '강남이 선호하는 이념의 교육제도' 라는 가치에 투표를 한 셈이다. 물론 기존의 8학군이 특목고와 자사고로 대체되고 8학군은 강남의 중하위권 학생들 혹은 강남의 상위권 학생들로 채워지고,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8학군보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면 강남의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이익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는 상대평가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남의 학부모는 입시 문제에 대해서는 집값에 대해서 만큼이나 극성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그 기저에 깔린 심리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노후에 대한 투자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순수한 '모성애' 라면 그렇게 그악스럽고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남 학부모들은 '경쟁' 이라는 명제를 택하였을까. 8학군에서 미적분을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과 과학고에서 선형대수를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은, 최소한 강남 학부모들에게 있어서 결과치는 같다. 그들이 원하는건 '세계적 인재',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식이 아닌, '명문대를 나와' '상위계층에 있는'(계층의 구분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학비도 더욱 비싸고 멀기까지 할-아무리 2MB라도 자사고를 강남에 몰아서 짓지는 않을 것이다-특목고와 자사고라는 대안은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 8학군과 강북 학교들의 관계, 그리고 자사고 및 특목고와 일반계 고등학교의 관계는 권력의 구조 면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자사고에서 교육을 받으나 8학군에서 교육을 받으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최상위층에 있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교육의 힘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은 별 다를게 없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자사고라면 사교육을 통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 확률이 떨어질 수까지 있다.
이것은 모종의 도덕주의적 기만을 말해준다. 노동조합의 조합주의적 행태를 욕하면서도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국가의 경제 발전'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자기세뇌를 한 채 2MB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의 심리와 비슷하리라. 자신의 자녀가 상대적인 계급구조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만 자신도 자각 못하는 사이에 그것이 국가주의적인 성공 담론과 혼재되어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하는 이드와 가치를 추구하는 초자아쯤 될 것이다. 강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도 공정택이 30% 이상의 특표율을 올린 것은 비단 강남뿐만이 아닌, 전 국민적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기만의 실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단지 '여유있는' 강남이 그들의 가치를 좀 더 숙고하였고 그것에 더 강하게 동기를 부여받고 투표소로 달려갔을 뿐이다. 이미 '강북' 혹은 '서민' 과 투쟁하는 대자적 계급으로 자신을 정립한 강남의 주민들은 즉자적 계급의식도 형성하지 못한채 강남의 욕망을 욕망하는 강북의 주민들과 그 적극성 측면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강남의 주민들은 그것이 비록 소외당한 욕망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만들 줄 알고 있다.
촛불은 사람들의 정의감은 자극하였지만 욕망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생활정치' 라는 호들갑은 역설적으로 상존하는 욕망에 의한 정치의 힘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결국 의식의 차원에 있는 정의감에서 투표소로 달려간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겉으로는 '경쟁 교육이 국가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초자아의 외피를 둘러쓴- 사람들보다 그 수가 적었다. 아마 에리히 프롬의 말이였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바꾸지 않고 모두를 중산층으로 만드려 했기 때문이라고.
예상보다 선전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패배한 것은 패배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정의는 그들의 욕망보다 치열하지 못했던 것이였고, 우리는 욕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놓고 욕망할 수 있는 정의의 언어-경쟁력, 국익으로 대표되는-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강북의 학부모들 마저 강남의 언어에 포섭되어 공정택을 욕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욕망을 둘러싼 담론은 2MB 가 당선된 지난 대선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시작된 촛불정국에서 욕망이라는 소재는 '민중의 생활에서 나온 요구' 이라는 초월적 당위성으로 포장된 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다.
이번 교육감 선거의 결과에 실망을 하거나 분노를 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이용' 할 것인지 '개조' 시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보는 각자에게 맡기겠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연애를 금지하고 무한경쟁의 틀에 학생들을 몰아넣는 공정택 체제에서 자란 학생들은 무엇을 욕망하게 될까?